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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12. 2022

겨울에 들춰보는 여름 일기

춥다 추워. 날씨가 추워지니 조금도 움직이기가 싫다. 새삼스레 지나간 여름이 아쉬워 여름에 썼던 일기를 뒤적여 보았다. 생각만 해도 맛있는 여름 생각.



집 앞 과일가게를 보며 계절을 가늠한다. 알이 작은 자두와 감자가 보이기 시작하면 '여름이 왔구나' 한다. 여름이 신호를 보내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감자 샐러드를 만드는 것이다. 껍질 벗긴 감자를 포슬포슬하게 쪄서 따뜻할 때 으깬 뒤 삶은 계란 노른자를 넣는다. 거기에 잘게 부순 아몬드를 듬뿍 넣고 고루 섞으면 끝. 이렇게 만든 감자 샐러드를 작은 통에 소분해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기분에 따라 마요네즈와 황설탕을 넣고 달달하게 먹을 때도 있고, 찐 옥수수 몇 알 혹은 채 썬 당근을 잔뜩 넣을 때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제일은, 부드러운 모닝빵이나 굽지 않은 식빵 사이에 넉넉하게 넣고 한입 베어 무는 것. 입 안 가득 느껴지는 여름의 맛에 일 년 내내 이 계절을 기다린다.


감자로 입맛을 다신 후에는 봉숭아꽃을 물색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별난 취미를 기억해 두었다가 시골 동네 텃밭에서 구해다 주시기도 했고, 친구가 직접 화분을 키워 꽃잎을 따주기도 했는데, 작년부터는 그냥 다이소에서 '봉숭아 빛 물들이기' 가루를 산다. 층간 소음 걱정하며 돌을 찧을 일도 없고 뒷정리도 편하고 색깔도 그럴 듯 하지만 설레는 기분은 좀 덜하다. 그래서 발가락도 들인다. 양으로 승부해 보려고. 올해는 애기 손가락에도 함께 물들였다.


봉숭아물까지 들였다면 이제 남은 것은 파스타 만들기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모두가 만족하는 메뉴가 파스타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토마토소스에 양파를 잔뜩 넣은 슴슴한 파스타가 메인인데, 여름엔 특별한 파스타가 등장한다. 토마토가지파스타와 고구마줄기크림파스타. 평소의 파스타에는 시판 토마토소스를 쓰지만 여름엔 특별히 어머니가 직접 키운 토마토를 하루 종일 끓여 소스를 만든다. 그리고 역시나 어머니가 따서 보낸 가지를 길게 잘라 면보다 많이 넣는다. 양파와 가지와 토마토가 전부인 파스타는 정말로, 진짜로, 너무 맛있다.


고구마 줄기는 여름에 한번 잘라 다듬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줄기에 얇은 껍질이 있어 먹으려면 손질하는 것이 일이다. 혹시나 그냥 주면 안 먹고 버릴까 부지런한 시아버지가 다 까서 보내주시는데, 그걸로 크림 파스타를 만들면 맛있다. 아삭한 고구마 줄기 식감이 크림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어... 이렇게 쓰니 맛집 블로그 포스팅하는 느낌이네. 아무튼 파스타까지 양껏 먹고 나면 올여름도 잘 보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올해는 아직 만들어 먹지 못했다. 애기 밥을 차리고 나면 내 몫을 새로 만들기가 왜 이렇게 귀찮은지! 여름 파스타를 못 먹고 여름을 보내게 될까 마음이 조급하다. 게으름을 떨치고 여름이 가기 전에 만들어 먹어야지, 그리곤 훌훌 보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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