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 그 말에 혹해 후루룩 읽어본 책은 그해 내가 꼽은 '올해의 책'이 되었다. 어디가 좋았는고 하면, 책날개부터.
정기적인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만큼만 일하고도 생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 실험하듯 시작한 생활이 이제 7년째를 맞았다.
- <숲 속의 자본주의자> 중
정확히는 '실험'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저자의 다른 책에도 프롤로그부터 실험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책은 우리 가족이 그렇게 '적당하게' 살아가는 실험을 담은 책이다.
- <오히려 최첨단 가족> 중
삶을 실험한다는 것. 생각해 본 적 없는 생각이다. 실험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것이잖아? 결과가 어떻든 또 해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사는 게 좀 가볍게 느껴졌다. 나도 내 삶을 실험해 볼 수 있을까.
저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이 모든 것들을 써먹지(?) 않고 가족과 함께 미국 시골에 들어가 산다. 일주일에 이틀 집에서 빵집을 열어 직접 통밀을 갈아 만든 빵을 팔고, 실험하듯 사는 삶의 면면을 글로 써서 메일로 정기 구독 서비스를 운영한다. 그렇게 부부가 '정기적인 임금 노동'에 종사하지 않은 채로 적은 돈을 적게 쓰며 산다. 농사라도 지어볼까 했지만 농사꾼이 되긴엔 너무 게으르다는 걸 깨달았고, 누가 뭐래도 낮잠이 소중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출근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농사 지을 땅은 있지만 알아서 자라는 야생 블랙베리만 취하며, 그마저도 따는 게 즐거울 정도만 따 먹고 나머지는 사슴에게 양보하는 게으름에 대해서는 ‘그렇지, 그럴 수 있어’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면, (물론 책에는 더 많은 이유가 나온다. ‘사슴을 증오하며 농사를 짓는 대신 사슴처럼 살기로’ 한 이유가!)
남들이 팔아달라고 하는 버터빵이나 바나나빵은 팔지 않고(덤으로 준다) 하루에 두세 개 팔릴까 말까 한 통밀빵에 지나치게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은 ‘그 기분 저도 알아요’ 하며 허리를 곧추세우게 했고,
낮잠 시간을 절대 지키겠다는 의지를 읽는 순간에는 거의 소름이 돋았다.
내가 낮잠을 참는다면, 세상에 작게나마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도 있고, 돈을 더 많이 벌고, 사회적 인정을 얻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가정 자체가 아주 이상하다는 것을 잘 안다.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오직 나에게만 중요한 '낮잠 따위'를 지키면서, 이 세상의 조건들과 타협하고 설득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나만의 진실한 삶이다.
저자가 말하는 오직 나에게만 중요한 ‘낮잠 따위’에 버금가는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게 ‘날씨’다. 날씨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나는 유독 더 민감하다. 덥든 춥든 해가 뜨는 맑은 날에는 컨디션이 좋고 우중충한 날에는 거의 앓아눕는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도 자도 잠이 쏟아지며 밖에 나가기가 싫다. 누굴 만나는 건 더 싫고.
내 기억엔 최초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유치원생 때부터 그랬다. 매일 날씨가 다르고 그에 따른 컨디션도 다른데, 심지어 여름과 겨울은 해가 뜨고 지는 시간도 다른데,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이 생활해야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규칙이라고 하니 꾸역꾸역 따르며 살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는 길에는 하늘을 보며 이게 다 저 구름의 농간이라고, 구름을 걷어 내면 해는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 그렇게 영향받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그러다 한 번씩 비가 많이 와서 회사에 갈 기분이 아니라고 회사 대표에게 전화를 거는 미친놈 같은 짓을 하기도 했지만, 사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나만 잘 참으면 말이다.
지금은 날씨를 따라 산다. 해가 일찍 뜨면 일찍 일어나 할 일을 하고, 우중충한 날에는 이불속에서 좀 더 뭉그적거리다가 밤늦게까지 할 일을 한다. 나도, 오직 나에게만 중요한 ‘날씨 따위’를 지키면서 일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기어코 찾은 것이다. 낮잠 에피소드를 보면서 유난스럽다고 생각한 내 ‘날씨 타령’이 나다움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도 내 삶의 골수를 맛보고 싶었다. 나만의 의미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나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꽤나 공이 드는 작업이다. 그런 삶의 독특성, 의미, 재미를 주목하고 찾아낼 사람은 우주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 섬세하고 주의 깊게, 너그럽게 천천히 들여다봐야만 보인다. 내게 시골은 이런 생각에 마음껏 빠져 있을 만한 넉넉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적은 생활비를 의미했다.
책을 덮고 나면, 저자가 누리는 현재의 삶은 그녀가 부유하기 때문도 아니고, 고학력자여서도 아니고, 미국에 살아서도 아니고, 타고난 자존감 때문도 아니고, 나다운 삶에 대해 치열하고 수고롭게 고민한 결과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된다.
'나다움'은 무엇인가, 그리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어떻게 먹고 사는가. 그래서 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 책의 제목이 ‘숲 속의 자연주의자’가 아니라 ‘숲 속의 자본주의자’인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용기 있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가진 돈이 적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용기와 대단함은 돈을 벌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키워가는 능력과 배짱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미덕이다.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돈이 모자라서 누리지 못하는 일들을 원하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능력과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
내가 가진 건 자존감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 끝에 얻은 나에 대한 이해다. 언제, 어떤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지, 무엇이 나를 채워주는지, 어떤 거리감이 좋은지, 나를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쫓아다니지 않을 수 있다. 시골에 오지 않아도 궁금해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다.
특히 좋았던 점은 자기가 택한 삶의 좋은 점만 나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삶을 권하지도,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조언하지도 않고, 본인 역시 삶을 실험 중이며 '나다운 삶'은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니 각자 찾아내자고 말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삶이 내게 꼭 맞는 코트 같은 삶일까. 오직 나에게만 중요한 무엇을 지키며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어려운 숙제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