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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30. 2023

내년에는 더 많이 실패해야지

2023년을 보내며

매년 연말엔 숙제하듯 혼자만의 연말정산을 한다. 이걸 해야 지난 일 년을 잘 보내줄 수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뭉그적대다 해가 지나서야 발행한 <2022, 올해의 oo> 이후 글을 다섯 개밖에 쓰지 못했는데 다시 돌아왔다. <2023, 올해의 oo>

 

올해의 인물: 둘째

둘째가 태어났다. 2월에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10월에 낳았으니 과연 올해의 인물은 너지. 둘째는 사랑이라더니, 참말이다. 신생아 키우기는 여전히 고되지만 첫째 때는 작디작은 아기가 소중하고 애틋해 눈물이 났는데, 둘째 때는 웃음이 난다. 남편도 그런가 보다. 경력직이란! 첫째의 이름에는 남편 이름 한 자를, 둘째 이름에는 내 이름 한 자를 넣어 지었다. 책임감이 이름에 걸린 기분이다.  


올해의 공간: 홈 스윗 홈

이사를 했다. 둘째의 등장으로 전국 방방곡곡 떠돌며 살아보기로 했던 계획이 무산되자, 우리는 아주 정착하기로 했다. 역시 인생은  아니면 도다. 빠듯한 예산과 욕심 사이에서 답이 나오지 않아서 열심히 손품, 발품을 팔았다. 덕분에 방방곡곡 같은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완성한 집이 '올해의 공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갈 궁리에 여념 없던 우리는 종일 집의 이곳저곳에 머문다. 햇살 쏟아지는 거실, 살던 집에서 기어코 들고  침대, 노란 커튼 아래 만들어둔 낮은 평상, 나무로 만든  ...  좋지만 우리가 가장 오래, 자주, 편하게 머무는 곳은 초록 커튼을 달아둔 작업실이다. 여긴 어린이 출입금지거든 :) 처음으로 비싼 의자도 샀다. 무려 커플 의자. 각자의 자리에 앉아 글도 쓰고 책도 만들고 드라마도 보고 논다. 우다다다 여기저기를 들쑤시던 아들도  방에 들어올  '엄마, 작업실 들어가도 돼요?' 하고 묻고, 자기 뽀로로 노트북을 들고 온다.  집에서 남자 셋과 재미나게 살아야지. 우리의  스윗 .  


올해의 소비: 인테리어

올해의 공간에 이어, 올해의 소비는 단연 인테리어.  인테리어 가격이 많이 올랐다더니, 정말이다. 살면서 가장 큰돈을 썼다. 큰돈을 쓸 때 우리는 스스로의 취향을 낱낱이 알게 된다(아 물론, 버는 것은 더럽게 힘든데 쓰는 것은 이렇게 쉽다는 사실도 또렷이 알게 된다). 남편은 조명의 위치나 서랍 문의 높이, 타일 간격 같은 게 중요한 사람이고, 나는 조명의 모양, 나무 톤, 커튼 색깔, 거울 크기 같은 게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매일같이 공사 현장에 찾아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고, 남편은 거울 하나 고르는 데 몇 주를 고민하는 내가 이상하게 여겨졌을 테지만, 여태 서로의 영역을 채우며 완성한 결과물이 만족스러웠기에 이번에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역시는 역시다.

 

올해의 변화: 백수 남편

남편이 백수가 되었다. 자꾸 오르는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쏟아부은 가게였다. 13년 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불안해하던 남편과 달리 나는 좋았다. 남편이 입버릇처럼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거뿐이지' 할 때마다, 재능 많고 부지런한 사람이 자기 세상을 5평짜리 가게에 가둬두는 것 같아 속상했는데 자의든 타이든 5평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좀 가난해지기는 하겠지만, 우린 아직 젊고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을 테니까 오히려 좋다. 우리 집 인테리어를 하면서 인테리어에 부쩍 관심이 생긴 남편을 위해 건축학교 지원서를 내주었다. 귀엽게 벌어 적게 쓰면 된다고, 당분간은 배우고 싶은 걸 배워보라고 큰소리를 탕탕 치고 치킨도 시켰다(내가 좋아하는 처갓집양념통닭으로다가). 아무튼, 늘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 응원을 받는 건 내 쪽이었는데, 남편을 응원해 줄 수 있어 기쁘다.  


올해의 슬픔: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늙은 친구. 우리 할머니.   전에 병원에서 할머니를 만났는데, 2 전엔 두어  통화도 했는데, 그때 평소와 같은 말투로 '애기는  ?' 묻고는 '사랑해' 하고 끊으셨는데, 망했다. 우리가, 특히나 아빠가 할머니를  보내드릴  있을까. 울면서 도착한 장례식장에서는 까만 옷을 입은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났다. 장례식에서 상주가 어떻게 웃을  있는 거지 생각하곤 했었는데 웃음이 났다. 반갑고, 고마워서. 그보다 훨씬  많이 울음이 났지만.

할머니를 아주 보내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피곤함에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거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캄캄한 거실에 혼자 앉아 할머니와의 마지막 통화 녹음을 반복해 들으면서 '엄마아' 하고 엉엉 울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깨어 있었지만 계속 자는 척을 했다. 편하게 엉엉 울었으면 해서.

어제 처음으로 할머니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할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애기는 잘 커?’ 하고 물었다. ‘할머니 이거 꿈인가 봐. 할머니 이제 없어. 돌아가셨어’ 하는 내게 ‘응 알어, 어서 돌아가렴'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차 같은 걸 타고 돌아가다가 어떤 터널을 지나기 전 사진을 남겨두려고 뒤를 돌았는데, 온 세상이 분홍으로 흐드러진 꽃밭이었다. 할머니가 좋은 곳에 가셨나 보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올해의 도전: 강의

작년에 강의 관련 수업을 들으며 인연이 된 사람들과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30대부터 70대까지, 나이도 성별도, 강의 주제도, 경력도 다르지만 아무튼 성실한 사람들. 강의 주제를 정하고, 서로의 앞에서 시연을 하고, 재능기부 강의를 기획해 직접 해보며 함께 시간을 쌓았다. 올해는 단체로 봄, 가을 학기 강의를 '돈 받고' 맡게 되었다. 돈을 받으면 돈 받는 값을 해야 한다며 2주에 한 번씩 만나 강의 준비를 하고, 순살이 되도록 피드백하고, 강의 당일엔 혹시나 사람이 별로 안 올까 미리 가서 자리를 채워주었다.

덕분에 할 수 있었다, 강의. 4주짜리 그림책 만들기와 2주짜리 콘텐츠 강의를 준비하며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곧 내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면 이제는 내가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 혼자였다면 또 생각만 하고 끝났을 것이라 감사, 또 감사하다.


올해의 책: <웨스 앤더슨>, <KIM WOOJIN>

올해 목표 중 하나는 사이드 프로젝트로 새로운 팀과 책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어쩌다 비슷하고도 다른 두 권의 책을 작업했다. 두 책 모두 작가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작품을 그러모은 아카이빙 성격의 책이었고, 작업사양(양장+케이스)도 비슷했다. 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의뢰했다는 점도 공통점이었는데, 다시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다가 막상 같이 일하려니 아주 잘하고 싶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서점을 들락거리고 자료를 찾고 밤을 새웠다. 오랜만에 책 만들기가 고되다고 느꼈다. 그 과정에서 두 작가와 작품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내가 아카이빙 성격의 책을 좋아한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의 시간과 피 땀 눈물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편집자의 피땀눈물도 조금, 아니 많이 섞인다). 또 최근엔 텍스트 위주의 책만 만들다가 오랜만에 이미지가 잔뜩 들어간 책을 만들게 되었는데, 레이아웃부터 종이, 인쇄까지 신경 쓸 게 아주 많고 가성비도 확연히 떨어지지만, 완성되었을 때의 만족감도 비할 수 없이 크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게는 늘 숙제 같았던, '어떤 책을 만들고 싶어요?'라는 질문에, 앞으로는 어느 정도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의 콘텐츠: 폴인(fol:in)

폴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한 달쯤 들락거리다 보니 내가 무엇에 잘 낚이는지 보인다. 에디터, 기획, 콘텐츠 같은 키워드가 있으면 무조건 누르고 보는데, 최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시리즈는 <핵개인: 자기 서사를 만든 사람들>이다. 마인드마이너 송길영 님이 인터뷰어, 윤종신/이슬아/이연/노홍철 님이 인터뷰이로 참여한 시리즈로, 정해진 길이 아니라 자기 서사를 만들어 플랫폼이 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콘텐츠다. 인터뷰이가 하나같이 좋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꾸준히 본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만의 서사입니다.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기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송길영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중에서  

<월간 윤종신>으로 자기만의 월기를 써 내려가며 '흥했다, 망했다'의 기준을 없애버린 윤종신 님이나 <일간 이슬아>로 매일의 이야기를 기록해 나간 이슬아 님이나 '잘하는 것, 이미 가진 것을 엮어' 자기 이야기를 꾸준히 업로드하는 이연 님이나 좋아하는 걸 계속해나가는 노홍철 님이나 방법이나 색깔을 제각각이지만 결론은 꾸준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도 브런치로부터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로 시작하는 알림을 받았다. 꾸준히, 꾸준히, 가장 어렵지만 확실한 방법임을 되새긴다. 나만의 서사를 꾸준히 쌓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부탁한다 내년의 나야.      


올해의 BGM: 김동률 <오래된 노래>

동생이 생일 선물로 김동률 콘서트 티켓을 주었다. 아, 콘서트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감도 안 왔다. 출산예정일을 보름 앞두고 부를 대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도착한 우리는 엄청난 인파에 기겁하며

- 혹시 콘서트 도중에 진통이 오면 잘 빠져나갈 수 있겠지?

- 걱정 마, 내가 소리를 크게 지를게. 비키세요!!! 아기 나와요!!!

걱정 섞인 농담을 주고받았다. 콘서트 시작 전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뭐지, 호르몬 때문인가. 막상 라이브가 시작되고서는 또 좋아서 헤헤 실실 웃고 있었는데, 같은 노래에 또 터졌다. 집에 돌아온 뒤 우리는 매일 이 노래를 듣는다. 심지어 진통하는 와중에 가족분만실에서도 이 노래를 틀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 노래가 흐른다. <오래된 노래>를 시작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 <사랑한다 말해도>를 듣고 나면 그 뒤로는 <잘 지내자, 우리> <소리> <모르죠> 같은 노래들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동생이 선물한 건 콘서트 티켓이 아니라 음악이었다고 혼자서 생각한다. <오래된 노래>는 20대의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는 사실을 번뜩 깨달았다.

아이를 키우며 잊고, 또 잃어가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음악이다.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노래보다 동요를 더 많이 듣게 되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노래 대신 고요를 택한다. 아침에 지각을 하더라도 샤워할 때 들을 '오늘의 노래'를 신중히 고르던 우리였는데, 여전한 동생과 달리 나는 깜빡 잊고 지냈다. 음악을 잃지 말아야지, 아 아기가 깨면 안 되니까 볼륨은 줄여야지.


올해의 물건: 커피머신

친구 부부가 집들이 선물로 커피머신을 사 왔다. 전에도 커피머신을 쓰고 있긴 했는데, 손님들에게 커피를 대접할 때마다 영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심지어 남편은 싫어했다. 쓰기만 하고 맛이 없다나. 새 머신을 들인 후 우리는 카페를 잘 안 간다. 무거운 몸 때문에 못 나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커피가 맛있어서 카페 생각이 안 났다. 임산부일 때도, 모유수유 중인 지금도 디카페인 원두를 종류별로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다. 캡슐 커피가 싫다던 남편은 외출할 때마다 큰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서 나간다. 매일 습관처럼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수혈하던 지난날과 달리, 어쩌다 한 번씩 카페에 갈 때는 시그니처 메뉴를 음미하며 먹는다. 덕분에 뒤늦게 크림라떼에 빠졌다. 살찌는 소리가 들린다.       


올해의 대화: 영어로 말해요

작년 여름, 발리의 버거 가게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일하는 두바이 출신의 사업가를 만났다. 발리가 신혼여행이나 서퍼들의 천국뿐만 아니라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라고 불린다 하여 아주 관심이 많았는데, 막상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니 내 짧은 영어가 발목을 잡았다.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도 진땀을 빼고는 서울에 돌아와 바로 화상영어 수업을 신청했다. 올해 2월부터는 오프라인 영어스터디 모임을 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2주에 한 번 주제를 정해놓고 수다를 떠는데 내가 제일 못한다. 한두 달은 할 말을 달달 외워 가서 랩 하듯 뱉어 내거나 끄덕끄덕 웃으며 리액션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가만 보니 다들 일단 뱉고 본다. 발음도 문법도 신경 쓰지 않고 용감하게 하고픈 말을 던지고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게 언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도 결국 의사소통 도구로서의 언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너무 의미부여를 했나 싶어 요즘은 그냥 나도 용기를 낸다. 물론 영어가 늘진 않는다. 하지만 더 이상 영어로 말하는 시간이 부담스럽지 않다. 종종 언젠가 다시 발리의 버거 가게에 앉아 있을 나를 생각한다. 누구를 만나든 하고픈 말을 신나게 떠들 수 있는 그날까지 킵고잉 해야지.



올해의 00을 적으며, '올해의 실패'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실패라고 할 만한 일이 딱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시도를 많이 하지 않았나 보다. 내년의 목표를 '실패'라 적는다.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실패하기를. 몇 살이든 쑥쑥 자라는 사람이 되기를. 굿바이 2023!



2022 연말정산

https://brunch.co.kr/@vvmomovv/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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