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에도 그 날은 온다
서핑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 생리였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월급날보다 정확하게 생리주기가 돌아온다. 남들은 그게 건강한 거라고 하던데, 나는 그게 참 싫었다. 심지어 생리통까지 심했으니 그날이 오면 배란되는 난자 수를 절반 뚝 떼서 누군가에게 기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전부를.
서핑을 배우기 시작한 지 3주째, 뭔가 아랫배가 더부룩하고 꿀렁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또 그날이 찾아왔다. 바다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누군가 배와 허리에 잽을 연타로 날리는 것처럼 띵띵한 느낌이 들었다. 아, 제발 이러지 좀 마쇼. 한참 재미를 붙이던 터에 찾아온 생리는 정말이지 불청객이다. 비상용 생리대를 챙겨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바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죠스> 배경음악과 함께 시뻘게지는 바다 모습이 그려졌다. 결국 진통제 몇 알을 손에 쥐고 아픈 배를 붙잡고 바다를 쳐다만 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탐폰 쓰면 되는데, 탐폰도 계속 바꿔줘야 해.”
에스더가 탐폰을 내밀었다. 탐폰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손가락 같이 생겼는데 주사기네. 그게 탐폰의 첫인상이었다. 먹는 거, 마시는 거, 입는 거, 타는 거, 다 새로운 걸 좋아하고 겁 없이 일단 발부터 들이미는 성격이지만 왠지 생리용품만큼은 쓰던 걸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이 오면 복어처럼 부풀어 삐죽삐죽 가시가 서고, 원래였다면 안 닿을 곳에도 가시가 닿으니까. 그런 민감한 순간에 변화를 주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또 몸 안에 뭔가를 넣는다는 게 괜히 무섭기도 하고.
선택을 해야 했다. 이 날이든 저 날이든 서핑을 하며 살지, 아니면 “그날이에요” 하면서 침대에 가서 끙끙댈지. 머릿속에서 핑핑 계산이 돌았다. 한 달이면 최대 일주일은 생리를 하는데, 1년이면 그게 12주, 10년이면 120주인데, 그 시간 동안 서핑을 못한다면? ‘절대 안 돼!’ 미래의 내가 어디선가 소리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생리를 할 수밖에 없고 서핑을 타야만 한다면, 그게 디폴트값이라면, 내가 바뀌는 수밖에.
탐폰을 하고 바다에 처음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주변이 피바다가 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다는 마냥 파랗기만 했다. 염려의 시간이 지나자 신세계가 열렸다.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왜 진작 바꿀 생각을 못했지?’ 20년 넘게 생리대를 고집했던 지난날의 내가 미련하고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음엔 생리컵도 한번 써봐. 그게 최고야.”
서핑이 끝난 후 탐폰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말에 에스더가 말했다. 생리컵이라……. 탐폰으로 신세계를 맛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거리낌이 있었다. 몇몇 친구가 이미 쓰고 있어서 그 존재는 알았지만, 에스프레소 잔처럼 생긴 모양새 때문에 탐폰보다 더 쓸 생각이 없었던 생리용품이었다. 저걸 어떻게 내 몸에 넣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다에 나갔다가 몇 번 육지로 나와 갈아줘야 했지만 탐폰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생리컵까지는 굳이…….
“생리컵 쓰면 서핑 하다가 중간에 안 나가도 돼.”
에스더의 마지막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탐폰으로 이미 한번 바뀌었으니까, 이제는 또 변화 없이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지금껏 쓸데없는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탐폰 정도의 불편은 괜찮아’ 하고 금방 자위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그래서 꼭 필요하진 않더라도 생리컵을 써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안 맞으면 안 하면 되지, 뭐. 굳이 처음부터 안 하겠다고 차단해버릴 필요는 없잖아 싶었다.
그 결과는? 서핑 하러 가는 나의 캐리어에는 이제 생리컵을 위한 자리가 정해져 있다. 탐폰이 열어준 게 인간세상의 신세계였다면, 생리컵은 정말 신의 시계를 열어줬다. 처음 할 때 힘들다는 것만 빼면 바닷물에 젖지도 않아 더 위생적이고, 다른 생리용품처럼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화학약품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생리통이 확 줄어들었다. 이렇게 서핑으로 내 생활이, 내가 바뀌는 게 참 좋다.
이제는 그날이 와도 별 걱정이 없다. 그날에도 나는 여느 날처럼 서핑을 할 거니까. 그날이 오면 하는 생각은 딱 하나다. 정말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