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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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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Jan 13. 2017

혼자 걷는 경주

경주는 무리의 냄새가 나는 곳이다. 홀로 거니는 경주는 낯설다. 관광버스 몇 대에서 우르르 내리고 우르르 타고를 반복하며, 집단으로 자고 집단으로 먹고 집단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경주의 풍경이다. 내 경우엔 아마도 중학교 수학여행지가 경주였던 듯하다. 아마도라는 말을 붙인 건 경주의 풍경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다는 사실만 남아있고 수학여행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뻔하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국립경주박물관을 방문했을 테고 불국사 근처 유스호스텔에서 자고, 어디 대형 식당에 가서 밥만 먹고 쓱 빠졌을 텐데 그 모든 것은 이름만 남고 모조리 증발하였다. 

경주는 여행보다 관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다. 비슷한 단어로는 중국 장가계를 들 수 있다. 지방방송에서 촌스러운 중국 음악이 깔리고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중국문화탐방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때리는 장가계 말이다. 매 분기마다, 10년 이상 이 광고를 본 것 같다. 장가계를 개인적으로 여행한 한국인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 물론, 나도 장가계를 단체로 갔다. 처음이자 마지막 패키지 관광으로.

단체 관광지라는 기억 때문에 경주는 혼자 여행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매번 뒷전으로 밀린다. 경주는 이미 거대한 무리의 일원으로 가본 곳이기에 굳이 다시 찾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학생 때, 나는 내일로를 자주 활용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단 한 번도 경주를 찾은 적은 없었다. 대구를 가고 포항을 가고 울산을 가도 경주에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방문 한 경주도, 역시 단체에 의한 것이었다. 단체 관광지 경주에서도 단체를 모아두는 보문호의 어느 호텔에서 보수교육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단체의 냄새 앞뒤에 혼자의 흔적을 남겨두기로 했다.

하루 일찍 경주를 찾았다. 그리고 조금 늦게 경주를 떠났다. 그렇게 혼자 경주를 거닐기로 했다.



경주는 분지다. 정확히 말하면 경주 시가지가 분지다. 경주역 앞에 놓인 원화로. 원화로와 평행을 이루는 듯 남북으로 흐르는 형산강. 각각 형산강의 동쪽과 동남쪽으로 늘어진 알천과 문천. 경주역을 중심으로 형산강은 서천, 알천은 북천, 문천은 남천으로 불리며 옛 경주의 중심을 품는다. 알천을 따라가보면 보문호가 나오고 문천을 따라가보면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과 국립경주박물관을 지나 불국사가 나온다. 하천의 지류를 따라가보면 토함산이 나오고 석굴암이 나오는데, 석굴암은 토함산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석굴암에 떨어진 비는 문천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종천을 향한다. 대종천은 감은사지를 거쳐 동해의 문무대왕릉에서 비로소 한 끗 차이로 문천으로 헤어졌던 동료와 재회한다. 다시 형산강과 문천으로 돌아와서, 두 물줄기 사이에는 남산이 있고 남산엔 포석정과 삼릉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경주는, 강과 산이 겹쳐서 만든 아주 평탄하고 좋은 땅을 찾은 사람들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 현재의 사람들은 꽤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1979년에 세워진 경주의 도시계획도 그 일부이다. 당시 도시계획에서 경주 시가지는 7~25m의 고도제한을 하여 높은 건물이 경주 분지의 이야기를 감추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두었다. 최저 높이를 7m로 해놓은 것은 첨성대의 높이가 9.17m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의 어디에 서든, 옛 유적들이 왜소하게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대릉원이나 월성 근처의 땅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면 유적, 현재의 삶, 산, 그 뒤의 산으로 겹겹이 풍경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한 군데가 유난히 튀어나와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울려 모두를 품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경주는 넓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그리고 그 넓은 땅과 하늘에 펼쳐진 풍경에 홀로 서있다 보면 언젠가 이 땅의 집단 속에 머물렀던 내 모습과 지금의 내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기억나지 않았던 중학교 수학여행의 풍경은 어느 공간에 섰을 때 흐릿하게 스치기도 했다. 이를테면 경주국립박물관에 갔을 땐 역사관과 에밀레종 사이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의 풍경이 스쳤다. 재밌는 건 그 풍경에 내가 뛰어노는 게 아니라 그냥 바라보는 그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리 속에 머문 적이 드문 듯하다.


무리가 더 편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까지였던 것 같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 딱 그때까지만.


나는 대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고, 딱히 집단에 속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특히 대학 무렵에는 거의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오티에서 나는 집단과 섞이지 않았고, 파릇파릇한 3월의 신입생에 이미 무리에서 벗어났다. 나는 집단 속에서 언제나 겉돌았고, 내가 어딜 가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차렸다.


그나마 그 무리에 대한 혐오는 군 생활을 하며 많이 수그러들긴 했다. 아, 잠시 경주의 얘기를 해보자. 사진은 대릉원 옆 쪽샘지구 유적 발굴 터에 덜렁 남아있는 집이다. 이 일대는 2007년부터 유적 발굴을 하고 고분을 복원하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였는데, 저 건물은 매입이 되지 않아 남아있는 것이다. 고분과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길도 제대로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러니까 저 집과 집 주인은 이웃 주민이 하나둘씩 떠나고 커다란 중장비가 들어와 이웃집을 허물고 놓여있던 아스팔트 도로를 파헤치는 와중에 저렇게 홀로 남아있는 것이다. 

경주는 천년고도이기에 일단 시가지 밑을 파헤쳐 보면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모든 건물은 재개발할 때 문화재 조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만약 건물을 허물다 유적이 나오면 공사는 유적을 다 발굴할 때까지 그대로 중단된다. 그동안 건축주에 대한 보상은 전무하다. 오히려 발굴비를 건축주가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지정된 문화재 보호구역 안의 건물들은 꽤나 많은 건물들이 낡은 채로 그대로 남아있다. 7m의 고도제한에 증,개축이 허용되지 않으니 죄다 낡은 단층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 땅값도 오르지 않는다. 사실 재산권자의 입장에서는 악밖에 남을 수밖에 없다. 내 집의 가격은 얼마 되지도 않기에, 문화재를 발굴한다고 그 집을 팔고 나간다고 한들 경주시내에서 그만한 집을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적발굴관 직원에게 저 건물에 대해 물었을 때, 저 집은 어쨌든 허물어져야 한다고 말을 했다. 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경주의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고도제한과 개발 제한에도 찬성한다. 그리고 저 집주인이 가질 억울함과 분노도 이해한다. 보상이 형편없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리고 저렇게 덩그러니 놓여있는 낡은 집 하나도 달리보면 역사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혼자 경주를 걷고 밤이 되었을 땐,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게스트하우스는 주요 관광지에서 조금 먼 알천 위쪽에 있었다. 경주 지진 여파로 급격하게 줄어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반값으로 세일을 했는데도, 그 넓은 게스트하우스에 게스트는 나 하나뿐이었다. 도미토리에 놓인 4개의 침대에 나만 누운 것이 아니라, 그 건물 자체에 게스트는 나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 대릉원을 거닐다 첨성대 근처에서 10번 버스를 타고 보문호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나는 집단 속에 섞여 적당히 같이있다 다시 홀로 떨어져 나왔다. 


그 집단의 몇몇은 가을과 겨울 사이 일을 마치면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사람을 일대 일로 만날 땐 꽤나 다정한 사람이 되는데, 그 사람이 집단에 속해있으면 아주 데면데면한 태도를 유지한다. 카우치서핑으로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호스트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편안해했었지만, 호스트의 친구가 떼로 몰려오면 그 속에서 불편해졌다. 나는 집단 속에서 내 자리를 몰랐고, 내 말의 위치를 찾지 못 했다. 


나는 한때 그것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그것을 거의 내 성향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옷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관계'가 절실한 것이라 여겼지만 관계에 집착할수록 나는 황폐해졌다. 지나고 보니 나는 '관계욕'과 '인정욕'을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인정에 관한 욕망은 있으나 관계에 관한 욕망은 희박한데, 그때의 나는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은 것으로 여겼다. 공교롭게도 관계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나를 망가뜨리는 기제였다. 관계를 좇으면 내가 없어지고 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으로 치환되어버리곤 했다.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의 나를 보곤 했다.


일박이일 동안 집단 속에 머물다 관광버스를 타고 다시 경주시내로 가는 길엔 수많은 까마귀 무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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