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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25. 2024

꺼뜨려서는 안 되는 불씨였다

완성의 과정


아들은 주일 아침부터 종이 접기에 열심이다. 변신로봇까지 척척 만들고 제법 솜씨가 좋다. 동생이 만든 완성품이 근사해 보였는지 책만 읽던 딸도 종이 접기에 도전한다. 뭐만 찾아보라 하면 엄마를 불러 젖히는 아들은 종이 접기에 있어서만큼은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법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연구해 보다가 안되면 엄마나 아빠에게 가져간다. 그마저도 매의 눈으로 지켜보다가 알겠다 싶거나 본인이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냉큼 가져가서 본인이 완성하고야 만다.


반면에 딸은 조금만 어려워도 SOS를 친다. 알려주어도 쉽게 터득하지 못하는 본인의 실력에 낙담한다. 편도가 부어서 말을 못 하는 나 대신 아빠에게 갔는데 역시나 아빠의 목소리톤이 올라간다.


다 접고 나면 꼭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다림질을 이렇게 대충 하면 안 돼. 기초공사를 잘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너무 어려운 걸 골랐잖아. 욕심부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란 말이야."


대충 이런 말들을 단계적으로 반복하다가 인내심이 금세 바닥난 듯했다. 이내 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딸의 울음소리는 애~앵 민방위 경보음처럼 첫 시작부터 그러데이션을 이룬다. 울음소리를 자체적으로 소거하기 위해 이불로 가서 고개를 파묻고 우는 아들과는 달리, 딸은 목청을 드러내놓고 운다. 평소 조용한 성격과는 다른 모습이다. 속상하니 와서 안아달라는 표현일 텐데, 다가갈수록 내 귀에 크게 울리는 데시벨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으아~앙"


아빠는 더 큰 목소리로 딸에게 본인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훈계를 하지만 그것이 딸에게 들릴 리 없다. 이미 그녀의 고막까지 눈물로 가득 차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주일 예배에 갈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급한 대로 색종이를 꺼냈다. 아빠에게 아이들을 먼저 주일학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내려갔다. 시간도 빠듯한데 너무 글씨를 작게 썼나, 남는 공간에는 하트를 그려 넣고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가득 채웠다.


내가 딸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동생과 비교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어른인 나부터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이제야 출발했는데 쟤는 저만큼 가 있고 뛰는 수준도 다르니 속상할밖에. 연년생 동생이라 그런지 수준차이가 크지 않아서 가끔 동생에게 밀리기도 하는 누나의 마음에는 비교와 질투, 경쟁심과 좌절감이 있을 것이다.


워낙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자진해서 열외 되는 편이었던 나는, 그것이 경쟁사회에서 좋은 태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태도는 불타오르는 경쟁심을 가라앉히는 효과는 있었지만 자칫하면 뭐, 더 좋은 게 있겠지. 나도 저걸 그다지 원했던 건 아니야,라는 합리화나 자기기만에 빠지기 쉬웠다. 그렇다고 모두가 바라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더 열심을 내야 했다기보다는 나의 강점과 나만의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더 해야 했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딸의 속상한 마음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도 쟤만큼 잘하고 싶다는 욕구, 그것을 꺼뜨리거나 숨겨두게 하기보다는 후, 하고 불어서 불의 방향을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꺼뜨려도 꺼지지 않는 불씨는 나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마음껏 타오르지 못한다면 그 속은 언젠가 새까맣게 그을리게 마련이므로.




흔히들 각자 잘하는 게 다르다고 하는데, 잘한다는 것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는 않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성과로 측정이 가능하겠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잘할 수 있는 영역과 기준이 좀 더 제각각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의 시각이 우수와 최우수를 가를 뿐이다. 그저 좋아하는 것부터 다를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여러 번 하다 보면 클레이 놀이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 아이들의 세계다. 클레이 모양을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이 잘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색깔 배합을 잘해서 새로운 색을 창조해 내는 것이 잘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놀이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한다. 완성작을 보고 클레이를 잘 만들었다는 평가는 결과만 놓고 보는 어른의 기준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이에게 그 과정과 결과를 그대로 인정할 것을 제안했다. 



내가 듣고 싶던 말, 네게 하고 싶은 말


"모든 걸 다 잘할 수 없고, 다 잘할 필요도 없단다. 다만 네가 잘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면, 처음부터 천천히 해보자. 처음부터 완성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리고 완성하는 기쁨은 내 손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단다. 그러니 쉬운 단계부터 시작해서 점차 완성해 가는 과정의 기쁨을 누려보자. 엄마도 함께 할게."


편지지를 대신한 색종이 한 면을 가득 채워 쓰고 보니, 이것은 역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어설픈 허당이면서도 완벽주의 기질을 갖고 있던 과거의 내게도 필요한 말이었고, 많이 늦은 건 아닐까 막막한 서른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의 내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목이 아프지 않았다면 동생과 비교하지 말라는 말부터 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경보음 같은 울음소리에 부닥치고 부서져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글로 옮기다 보니 전할 말이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므로 목이 아픈 것도 감사할 일이었다.


부랴부랴 아이의 부서에 들러 편지를 전해주고 예배에 참석했다. 편지를 받아 든 아이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 꽃처럼 예뻤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데리러 갔을 때에도 아이는 손에 그 편지를 꼭 쥐고 있었다. 글에 담긴 마음까지 전해진 모양이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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