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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Aug 18. 2024

프롤로그. 눈빛으로 사랑하고 말이 없던 여자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누가 뭐래도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셨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과연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심하고 호소하는 과정이 있었다. 눈빛은 멀리까지 전해질 리 없었다. 그리고 눈빛을 먹고 자라던 어린 시절을 지나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 대비도, 사돈에 대한 인사치레도 없이 딸을 시집보낸 엄마의 모습에 남편과 시댁의 눈치를 보며 혼자서 전전긍긍하던 시간이 있었다. 특히나 처음 겪는 출산과 초기 육아에 있어서 요즘 젊은 엄마들은 엄마찬스를 많이들 쓰는데, 나는 시어머니 찬스를 더 많이 쓴 것 같다. 시어머님도 같은 남쪽에 살아서 서울에 오려면 힘든 건 매한가지였건만 엄마는 딸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이미 딸 곁에서 두 살, 네 살 된 외손주의 육아를 돕고 계셨다.


호소를 넘어서 숨겨둔 마음속 원망을 한바탕 쏟아내고서 겨우 '엄마 찬스'를 얻어낼 수 있었다. 딸의 권리도 아니고 엄마의 의무도 아니지만 버젓이 살아있는 엄마의 무심함에 치를 떨던 날이 있었다. 그때는 왜 먼저 살펴주지 않는지 야속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집과 살림에 자기가 보탠 게 없어서, 그런 공간에 들어와 있을 면목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그녀를 헤아려본다.




눈빛으로 전해지던 엄마의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자라나는 과정은 모두 그녀의 눈에 담겼을 텐데 나는 그녀의 과거를 알지 못해서 궁금했다. 어쩌다 만난 외갓집 식구들이 엄마가 매우 예뻤노라고 말하던 순간부터 더 그러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남자보다 짧은 상고머리에 배와 가슴은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대중목욕탕에서 본 다른 아줌마들도 가슴과 뱃살이 쳐져있긴 마찬가지였지만 엄마보다 거대하진 않았다. 엄마는 평균 이상의 체중으로 일어날 때마다 끙, 읏차, 하는 소리를 늘 내었고 뛰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외할머니가 꺼내온 그녀의 고등학생 시절 사진을 두어 장 보고 나서야 믿을 수 있었다. 


엄마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달라진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전과 이후의 삶, 그 사이를 가르는 게 무언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차이가 심했다. 엄마가 무언가를 포기한 게 분명했다. 그것은 삶의 의지였을까, 희망이었을까.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누군가 나에게 동생이 있었을 뻔했다는 말을 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임신이 된 아이를 엄마가 '일부러' 지웠다고 했다. 왜 지웠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아이를 셋이나 키울 형편이 아니었다. 둘까지도 아니었다. 언니가 아들이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 병원에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내가 딸인 것을 알았더라면 나까지 지워졌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80년대 끝자락에 태어났다.




나는 엄마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리고 엄마는 아는 게 많았다. 유치원에도 못 가고 집에서 책만 읽던 시절, 궁금한 단어를 물어보면 엄마는 다 대답해 주었다. 나는 텔레비전과 헌책 이외의 문화를 많이 경험하지 못했는데 외국영화와 외국배우, 영어노래까지 외우는 엄마가 그저 대단해 보였다. 마을의 장이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 옛날 엄마는 영화관을 자주 다녔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그 시절이 궁금했고, 나의 엄마이기 전 그녀의 꿈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늘 말이 없었다. 잃어버린 무엇에 대해 할 말까지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녀의 어릴 적 배경보다도 그녀의 마음이 담긴 말을 듣고 싶었다. 후회라면 후회대로, 아쉬움이라면 아쉬움대로 내게 말해주길 바랐다. 내가 이해를 하든 못 하든, 좀 더 크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덧붙이더라도 인생이 어떤 것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본인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길 바란다면 어떤 부분이 그러한지까지도. 실패한 부모가 자식에게 인생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인 걸까. 가끔 아빠가 내뱉던 신세한탄이 아닌, 나는 부모로부터 진솔한 삶의 경험을 듣고 싶었다.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라도 내게 말로써 나눠주었다면, 가난한 삶의 적나라한 단면을 견디기가 조금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엄마는 내게 사랑을 담은 눈빛을 보냈던 게 아니라, 그녀의 눈에 나를 담아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녀의 눈에 내가 사랑스러워 보였다는 거니까. 어쨌든 눈빛은 충분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꼭 말을 덧붙이려 한다. 우선은 눈빛으로, 그다음 말로써.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체를 무엇으로 전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사랑은 교류하는 것이기에. 지금도 아이는 엄마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엄마는 무슨 색깔이 좋아? 엄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해? 엄마는 이게 예뻐 저게 예뻐? 이런 간단한 질문들 뿐만 아니라, 아이가 훗날 엄마는 왜 그랬어? 왜 그러지 않았어? 하고 묻거든, 나는 할 말이 있고 싶다. 변명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딸이 이해를 하건 못 하건, 나는 내 인생을 살았노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지나서 부끄럽게 살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선은 부끄럽지 않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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