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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26. 2024

친구 따라 강남 갈까 나락 갈까

헤매지 말고


친구라는 존재가 내게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진정한 우정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시절의 진심을 나누었던 유일한 존재들, 나의 내밀한 속마음을 보아주고 보여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다. 비단 친구 다 필요 없다는 엄마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친구들 사이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보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먼저 위하는 마음으로 친구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친구 따라' 어디 간다는 말보다는 '끼리끼리'라는 말을 차라리 더 신뢰하는 편이다. 당시엔 강남 가는 길은 아녔고 반대로 나락 간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가 좋아 따라나선 그 길에서 나는 가까스로 돌이켰다. 나의 살 길을 먼저 찾아야만 그나마 남은 체면도, 우정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살아보니 엄마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친구들에 목맬 필요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사느라 바빠서 멀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바빠도 마음 나눌 시간은 있고, 그럴 필요는 더더욱 있다. 다만 모든 마음을 진실로 나눌 친구가 없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뒤덮는 진정한 사실이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한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므로 친구는 딱 여기까지만 바라거나, 아니면 여기까지 바라서는 안 되는 존재다. 나의 슬픔에 진심으로 슬퍼해주는 것만큼이나 나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를 온전히 함께 해줄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인간의 마음이겠으나,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완벽히 헤아리지 못하는 주제의 인간인지라 이런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친구와도 삶과 마음을 공유할 때 전부 까발리지는 않는다. 각자가 느끼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체념보다는 차라리 지혜에 가깝다.


친구라 해서 모든 것을 나눌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친구다. 완벽한 타인이라는 관점에서 친구를 정의하자면 적당한 거리에서 응원하는 존재. 나는 그것이 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연약함을 지고 있는 친구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가 없으면 막연한 기대와 실망의 무한 사이클 속에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인간관계는 무너지고 만다. 친구는 때마다 마음을 나누는 존재다. 삶을 공유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기 위함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공유되지 않은 마음 이상으로 삶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불필요한 비교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절에는 삶이 밀접하게 연관됨으로써 우정을 쌓을 기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기가 될 뿐이며, 계속해서 그러한 방식으로 우정을 지속하는 것은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존재이고, 친구는 거울이며,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됨됨이를 수시로 보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이마저도 서로가 고만고만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어느 한쪽이 삶의 범위를 넓혀가거나 또는 치고 올라가거나 삶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때 비로소 우정의 한계가 드러난다. 내가 품을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핑계 대지 말아야 한다. 친구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함께 속했던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에 차마 손 흔들 수 없다면, 돌아서서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물론 손 흔들 수 있는 자는 빗자루 탄 친구 따라 강남에 갈 수도 있다. 열린 마음의 틈 사이로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진정한 친구라는 프레임에 집착하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넓혀가는 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실상의 삶을 나누면서 진실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최고요, 삶까지는 못 나누더라도 진실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유리창에 비친 삶의 한 조각을 보고 마음을 나누다 보면 뒤돌아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삶의 흔적을 보고 창 너머에 있는 삶으로 용기 내 다가가볼 수도 있다.


브런치라는 창에 쓰인 글 하나에, 우리는 그 너머의 삶을 읽는다. 그리고 그 삶에 진심을 적어 보낸다.


- 좋아요.

- 멋져요.

- 축하해요.

- 응원해요.

- 공감해요.


우리에겐 타인을 지지하는 마음이 있다. 그럼으로써 그와 닮은 나를 지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지지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결국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나를 아끼는 귀한 마음이다. 나를 사랑해야 비로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진실된 마음을 여기저기 전할수록,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범위가 넓어진다.


벗과 오랜 세월 삶을 깊이 공유했으나 그에 비례하여 진심으로 슬퍼해줄 수 없고, 기뻐해줄 수 없음에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삶을 공유한 것 자체가 사랑이다. 그 자체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큰 사랑이다. 견디고 부대끼는 것만큼 큰 사랑이 있을까. 성경에서도 사랑을 정의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속성은 '사랑은 오래 참고'이다. 꼴을 보고 견뎌내는 것에는 엄청난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만약, 진정한 친구를 찾아 나서다가 길을 잃고 나를 잃고 헤매고 있다면 다음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당신은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심을 전할 수 있다면. 당신이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에 대해 말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텍스트에 담긴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마음이든, 감사하고 응원하는 마음이든,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 전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찰나의 순간에도 진심은 드러날 수 있다. 그 순간 드러난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란다. 그리고 진심은 통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반드시 그 대상을 향한 진심이 아니어도 좋다. 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어떤 것에 대한 한 톨의 진심이 있다면 충분하다. 가짜 감흥과 거짓이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의 진짜 경탄과 감동은 충분히 나눌 가치가 있다.



*사진 출처: Pixabay, Aristal Br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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