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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3. 2024

내가 매일 기쁘게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찬사


사하라 사막의 모래와 별들 사이에서, 생텍쥐페리는 헐벗은 몸으로 지내며 할머니의 신앙을 옳다고 생각했다.(인간의 대지, 73p) 내게 있어 글쓰기는 신앙까진 아니더라도 엇비슷한 부분이 있다. 글을 쓸 때는 무엇을 숨길 수도 없는, 숨길 필요도 없는 광활한 세계에 헐벗은 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저 나로서 존재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쓰기의 세계에 돌입하고 몰입하는 순간이 기쁘다. 나는 스스로를 기쁘게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 기쁘다는 뜻은 사전적 의미로 다음과 같다.


기쁘다

: 욕구가 충족되어 마음이 흐뭇하고 흡족하다.


읽는 행위 자체로 욕구가 충족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쓰기 위해 읽는 편이다. 어휘나 문장 수집, 지식 습득을 위해서라기보다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내면의 것을 표현해 내는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황(사실)과 감정(느낌)의 묘사를 각각 어떤 흐름으로 전개해 나가는지가 나의 주요 관심사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제 느꼈던 감정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진실해야 한다.


글을 쓰며 흐뭇하고 흡족한 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진실된 감정을 건져 올리고 억지스럽지 않게 표현한 순간. 읽으며 무엇을 깨닫는 순간 느끼는 짜릿함과, 쓰면서 무엇을 끄집어낸 순간 느끼는 짜릿함을 비교해 본다. 전자도 결국 내가 한 번쯤 생각했던 것을 잘 표현해 냈다는 것에 대한 공감 어린 찬사다. 후자는 내 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것을 마침내 문장으로 꺼냈을 때 느끼는 쾌감이다. 그 문장을 첫 독자가 되어 제일 먼저 읽고 나면 스스로에게 찬사까지 보내게 된다. 그러니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촘촘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소설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글쓰기에 진심인 이유는, 단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가상의 이야기 대신 광막한 세상에서 펼쳐 보이는 세상에 대한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을만하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화려한 문체 때문도 아니고 배우고 싶은 지식이 있어서도 아닐 것이다. 다만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진실된 자세를 갈망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있는 그 마음 말이다.


우리는 마침내 서로 만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침묵에 파묻혀 오랫동안 서로의 옆구리만 스치며 길을 간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뜻도 없는 말들을 교환한다. 그러나 위험한 시간을 당해 보라. 그러면 그들은 서로 돕는다. 그들은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다른 양심을 발견함으로써 마음이 넓어진다. 사람들은 함빡 웃으며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면 자신이, 바다가 한없이 넓은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석방된 죄수처럼 보인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우리 안에 있는 한없이 넓은 바다, 그것은 다른 양심을 발견함으로써 발견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선은 타인을 향해야 한다. 타인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란 먼저 나의 양심을 깨워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석방된 죄수처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양심은 작동할 수 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그 자체가 변별이자 자기 행위를 결정하는 방향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글쓰기를 통해 양심을 깨우고 드러낸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불안한'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카누에 타서 노를 뒤로 저을 때, 물은 어디로 가는가? 물은 뒤로 갈 수 없다. 물이 뒤로 가면 원래 자리에 있던 물이 다시 뒤로 가야 하고, 이 과정이 물가까지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번 노를 저을 때마다 20톤의 물을 이동시키는 셈이 된다. 사실 물은 그리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우리다. 물은 무거운 물질이며 실제로 응집력이 강한 덩어리다. 그 특성을 이용해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간은 호수를 그리 많이 바꾸지 않는다. 대신에 호수는 우리의 행동에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세스 고딘, <의미의 시대>


그러나 또 양심이 발견되지 못하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떠랴. 호수 안에서 내 배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나는 호수를 그리 많이 바꾸진 못해도, 내가 쓴 글이 그다지 영향력은 없어도 호수는 나의 행동에 나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글쓰기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글쓰기는 분명히 지속되어야 할 가치다. 지금은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와 친구가 된 이유는 글을 쓰기 시작해서지만,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글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연재라는 독특한 시스템 덕분이다. 벌써  권의 브런치북을 발행했고, 두 권의 연재를 이어가는 중이다. 글은 매일 한 토막씩이라도 쓰고 있지만 한 편의 글로 완성해서 발행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한 권의 연재일을 이틀에서 하루로 변경했다. 열정보다는 의미를 지속하기로 했는데 연재일을 변경하고 나니 글이 막 써진다. 역시 의미를 찾으니 열정이 따라오나 보다.


열정을 따르는 것은 사치다. 가치를 따르는 것은 의무다. 열정은 즉각적인 기쁨을 가져다준다. 가치는 지속적인 의미를 선사한다. -애덤 그랜트


* 사진 출처: Pixabay, Jobert Aquino Aqu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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