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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10. 2024

인생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가치 있는 인생이란


브런치 팝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브런치 작가들의 '글쓰기 레시피'였다. 작가들의 글쓰기 요령을 소개하는 짧은 글이 레시피처럼 비치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실제 작가들에게 영감을 줬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박혜윤 작가의 필사노트가 눈에 띄었다.



순간적으로 손글씨가 맞나 싶었을 정도로 글씨체가 매력적이기도 했고,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글을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이나, 생각해 봄직한 글의 한 토막을 나만의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감을 받는 행위이자, 나에게 영감을 주는 행위이다. 마치 흐르는 물을 두 손에 담아 일부러 마시게 하는 일과 같다. 내가 내 영혼에게 물을 주는 행위인 것이다.


필사를 할 때마다 학창 시절 노트 필기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때와 명백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필기할 부분을 정하는 주체이다. 받아쓰기라는 행위는 똑같지만, 무엇을 받아낼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인생의 숙제는 저마다, 또 때마다 달라서 어떤 부분이 어느 때에 내 안에 스며드는지 살피는 맛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사의 흔적이 반갑기도 했고, 이 분은 어떤 글을 수집했었나 궁금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손에 힘을 주어 필사를 할 만한 문장들이었다. 이 문장을 손에 담아 마신 박혜윤 작가님과 나는 잠시나마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물의 원천인 메리 파이퍼에게도 가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앤 라모트의 책장을 덮게 되면 다음에 읽을 책은 박혜윤 작가님의 책이고, 그다음에 읽을 책은 메리 파이퍼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쓰인 글도 글이지만 나의 기록을 위해, 전시된 필사노트를 찍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통찰을 얻었다. 인생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한 구도와 적당한 거리에서 필사노트를 찍으려니 자꾸만 그림자가 생겨서 불편했다. 그러다 터득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자로 전체를 뒤덮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하니 노트에 적힌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예 가까이 갔더니 전체가 그림자로 뒤덮여서 사진 찍기가 수월했다. 글자를 읽는 데 필요한 빛은 충분했다. 빛은 다른 곳에서도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딱 거기 쓰인 글자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정도로.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진을 첨부할 때 밝기를 30으로 조정했다.



단순히 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에서 나는 인생을 생각했다. 인생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경험은 누구나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할 만한 어둠은 아니라는 것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속에서 비로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스며드는 빛처럼 생각지도 못한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을 다시 읽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적어도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저 조금의 어둠도 허용하지 않은 채 스포트라이트 앞에 전시되었다 거둬질 뿐인 인생보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치 있는 인생이란, 바로 자기 인생을 사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나의 인생을 살자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필사노트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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