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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l 16. 2024

말을 아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샷(shot)이 아닌 슛(shoot)이 되는 말하기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지만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엔 집과 가까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빌린 후 집에 와서 아이들과 낮잠을 잤다. 나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제일 늦게 일어났다. 쿵쿵, 잠결에 들렸던 소리의 정체는 언니가 보내 준 마카다미아를 깨먹는 소리였다. 남편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나를 깨웠다. 저녁 메뉴로는 백숙을 하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다. 남편이 끓여놓은 청국장으로 대충 저녁을 먹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집안을 정리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 두었던 세제가 마침 도착해서 빨래를 하고 건조기에 넣었다. 색종이 조각으로 너저분해진 거실 바닥과 책상을 정리했다. 그 사이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와 일주일간 잔뜩 쌓였던 분리수거 쓰레기들을 가지고 나다. 남편은 나간 김에 산책 겸 얼마 간 걷고 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를 말려주었다. 내가 책상에서 노트북으로 뭔가 하고 있으니 아들이 앉아서 한자를 쓴다. 일처리가 끝나서 노트북을 끄고 딸아이에게도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거실에선 아이들이 서로 알고 있는 한자를 써 보라며 퀴즈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 여보 나 이거하고 있으니까 쓰레기 버리고 와줘.

- 얘들아 숙제해라.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레 굴러간 하루였다. 사실은 에너지가 없어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에선 웬만하면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속으로 빠져들어가고만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집필한 김종원 작가님은 책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일상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일상 속 '순간'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어떻게 글이 삶이 되고, 삶이 글이 될 수 있는지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인문학은 내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느껴졌었는데, 인문학의 끝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말하기'라고 했다. 왜 책을 읽고, 왜 사색해야 하는지, 책을 덮고 난 뒤에 그저 다 읽었다고 하기보다는 어떤 문장이 내게 남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말 없는' 그 시간을 거치고 나서 나의 '말'은 어떻게 낼 것인가.




자기 전 아이들에게 성경동화를 읽어주고 내용을 잘 파악했는지 사실 질문을 던졌다. 돌아가면서 질문을 던지는데 갈수록 내용이 섬세해진다. 요셉의 형은 몇 명일까?로 시작한 나의 질문이 아들의 차례가 되자 요셉의 형들이 왜 요셉을 팔아넘겼을까?로 발전했다. 아들의 질문에 딸이 대답하길 '아버지가 요셉만 예뻐하고 요셉에게만 무지개색 옷을 입혀서'라고 대답했다. 정답이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들이 땡!이라고 했다. 정답은 '요셉이 형들에게 꿈을 이야기해서'였다. 책을 다시 보니 아들의 말이 맞다. 딸의 대답도 맥락상 맞는 말이었으나, 아들이 말한 것처럼 책에 나온 직접적인 원인은 이것이었다. 형들은 안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미웠는데,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자 질투심이 폭발한 것이다. 요셉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겠으나, 형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겠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하브루타식 토론을 했다. 매번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요셉은 그저 꿈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형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혼잣말이 아닌 이상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그 말을 받을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 위주로 생각하고 말할 때는 말이라는 것 자체에 악한 의도가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내 말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그 말을 받는 사람을 의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예의이자 말이 향하는 사람을 위한 존중이다. 말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는 그 말이 무거운 돌이 될 수도 있고, 뜨거운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실제로 휴직 기간임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는 사람을 최소화하는 편이다. 사실상 나의 말로 인한 허물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로 인해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경우엔 자연스럽게 침묵을 고수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오히려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을 아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의 어떤 말을 원하는 자 앞에서는 합당한 말로써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의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가. 진심이 담긴 말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이 괜찮아지기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수시로 말을 걸어오는 다정한 남편과 참새 같은 아이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아이들과 얼마나 말을 섞었는지 모른다. 궁금하지 않은 건강정보를 수시로 내게 말해주는 남편. 괜히 내게 와서 말을 걸고, 나를 부르고, 얼굴 한 번 비추고 가는 아이들. 이 존재들이 더 좋은 말을 하고 싶게 만든다. 예쁘게 말해주고 싶은 가장 간절한 대상들.


누군가에게 말을 해야 하는 존재이자 나 또한 누군가의 말을 받아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을 넉넉하게 받아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문장으로 삶을 읽어낸다. 사색이 없는 문장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글은 삶이 될 수 없다. 요셉의 형들과 같이 누군가 내게 전해준 말과 그 대상, 현상만을 바라보고 일희일비하기보다는 그 말 너머에 있는 그의 마음과 그의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그 삶이 내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책 읽는 시간, 글 쓰는 시간, 사색의 시간, 말없는 시간을 거치고 나서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 감정과 내 입장만을 위한 말은 아닐 것이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다듬고, 읽어내지 못한 마음을 더듬고, 편협한 정신을 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나는 한 뼘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은 잘 받아내야만 잘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은 내게서 쏘아대는 화살이나 총이 아니라, 한 점 슛이 되길 바란다. 누군가 건네준 그것을 잘 받아낸 후 골대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우러러보며 던져내는 말이 되기를. 그것이 나와 당신,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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