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 세계는 우주처럼 광활하다. 개별자의 '언어'와 '언어' 사이에는 무한의 간극이 있다. 마치 밤하늘 한눈에 보이는 오리온과 안드로메다가 수백만 광년의 거리에 놓여있듯.
영화 'Her'에서 진화한 운영체제는 '당신과 나의 단어들 사이에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라고 고백하였다. 이미 경험의 영역을 무한으로 확장한 사만다는 언어의 밀도가 그의 것과 달라졌다. 그 지점부터 남자는 사만다를 도저히 이해할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경험을 명징한 단어들의 나열로 규정한다는 것은 자칫 오만일 것이다. 추상의 단계를 한껏 높이면 다양한 모양과 색채의 경험들이 하나의 틀에 들어맞게 되는 편리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오해의 시작이다.
사실,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영역이 우리 삶의 더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 우리는 그래서 그 바깥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예술이 그 역할을 보조하고 있다.
하나의 단순한 행위는 하나의 문장으로 명료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시를 쓸까. 그 하나의 행위 이면에 담긴 대서사를 담는 일이기 때문이다. 뭉크의 그림을 보면 '죽음'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죽음' 바깥의 고통, 애환 그리고 고뇌의 대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예술이 아닌 실존적 관계와 소통이 필요하다. 띠라서 추상의 틀과 군더더기를 걷어 내고 실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기존의 상식과 관념을 배제하고 관찰에 오로지 집중해보자. 또한 소통의 과정에서는 서로의 모호한 언어를 해체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구체'로까지 닿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발상이 오해의 시작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 말 속에 상대의 공간을 나의 추상의 틀 속에 지배하려 하는 폭력이 숨어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