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관을 가는 걸 좋아한다.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 알았다. 그때 처음 가보았으니 어쩔 수 없다. 매혹적인 전시회를 탐방하는 일은 서울에서 하기가 훨씬 수월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열아홉 살의 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글을 쓰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 좁은 동네에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급증을 느꼈다.
항상 문화 인프라가 적은 걸 억울하게 느끼며 성장했으니 어쩌면 이 갈망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불모지는 풀이 잘 자라지 않는 땅이라지만, 그 사전적 의미에 있어서 나는 불모지의 정반대인 풍부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지리산 자락에 걸쳐 있는 동네에서 자랐으니까. 그런데 문화 인프라에서만큼은 불모지라고 불릴 만하다고 늘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고 닥치는 대로 전시회나 연극을 보러 다녔다. 뮤지컬도 좋았지만 연극이나 전시회가 더 취향이라는 걸 천천히 알게 됐다. 그리고 덜컥 돈도 별로 없는데 유럽 배낭여행을 가자 마음먹었다.
여행 파트너와 나는 경비는 최대한 아끼되 아주 강행군인 일정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이라면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미술관에 줄을 서가며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게 일상이었다. 어찌나 많이 돌아다녔던지 여행 중반에 이르자 둘 모두 발이 멀쩡하지가 않았다. 나는 오이디푸스(부은 발)가 되어서 운동화를 신을 수 없었고, 내 파트너는 한국에 돌아가자 정형외과를 다녀야 할 정도였다. (다시는 그렇게 여행 못 할 것 같다.)
여행은 고단했지만 나는 내가 미술관을 좋아한다는 걸 넘어서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에도 짙은 우울이 오랫동안 내 일상을 침투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영국의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에서 모네의 작품을 만났다. 그 넓은 전시장의 한쪽 벽면을 꽉 채울 만큼 큰 작품이었는데, 그 앞에 서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이었는데(아마도 수련 연작이라고 추측하는) 정말 거대한 그림이 나에게 주었던 알 수 없는 이상한 위로를 받아들이느라 발을 떼지 못했다.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 꼼짝도 않는 이유를 그때 처음 알았다. 카메라에 작품의 이름을 많이 담았었는데, 정말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고. 유럽 여행 막바지에 카메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허망한 일이었다. 내 카메라에 기억을 안일하게 담아두려고 했다가,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더듬어도 그 그림의 색채와 느낌만 남아 있을 뿐 제목을 영영 잊어버렸다. 인터넷으로 찾은 모네의 그림 중 어느 것도 내가 본 작품은 없었다. 다시 그 테이트 모던으로 가면 알 수 있을까? 언젠가 한 번 더 가볼 수 있길 소망해본다.
난 자연이 내게 주는 위로도 무척 사랑하지만 예술이 주는 위안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과수원 옆에도 미술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담하고 소박해도 괜찮다. 어린아이의 그림이라도 걸려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다.
분명 이 작은 마을에도, 작은 도시에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나뭇가지만 주워 담아 예술이라고 전시해도 난 그저 즐거울 것 같다. 거기에 제목을 짓고 그걸 담아온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한평생을 농사만 지어온 우리 할머니라든가 동네 어르신 분들의 손만 찍어도 근사한 사진 작품이 될 것만 같다. 흙을 너무 오래 만진 나머지 흙을 닮아가는 주름진 손들.
종종 야생화가 잔뜩 피어 있는 미술관이 과수원 옆에 생기면 좋겠다는 욕심 섞인 상상을 하곤 한다.
상상 속에만 있지만, 과수원 옆에 미술관이 생기신다면 여러분도 오시겠어요? 머릿속에 과수원 옆의 미술관을 상상해 보세요.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던 양이 든 상자처럼, 그 안엔 당신이 원하는 완벽한 미술관이 있을 거예요. 저의 미술관에 초대합니다. 모두의 마음에 아름다운 과수원 옆 미술관이 하나쯤 생겼으면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