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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수원옆미술관 Dec 03. 2022

깜깜한 낮에는 벽돌책을 든다

어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우울하겠구나, 짐작 가는 날이 있다.

마음을 밝히는 전구가 나간 것 같아 전구를 갈아 끼우고, 스위치를 켜보고 고치려 애써봐도 소용없는 그런 날.

마음이 깜깜해도 일상은 그대로이기에 삶을 이어가는 하루가 있다.


누군가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다가 갑자기 누르는 듯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일상이 매번 그렇다. 왜 다정하다가도 돌변하는지.

우울은 왜 항상 그런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지.

나는 궁금했지만 답을 구하려 하진 않았다. 불가해한 세상의 규칙, 아직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우울의 영역이라고 아주 오랜 시간 끝에 명랑하게 체념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포르투갈의 시인이 있다. 그의 시보다 그를 더 대표하는 유명한 에세이, 『불안의 서』는 그의 사후에 2만 7천 매가 넘는 원고가 발견되어 발표된 책이다. 내밀한 사유를 훔쳐보는 듯, 일기와 문학을 묘하게 넘나드는 그 책을 난 좋아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이 글을 출간하는 것을 과연 달가워했을까 하는 의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옮긴이가 배수아 소설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문장이 아름다워서.


아무튼 이 책은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 장작으로 쓰기 좋다. 내 마음을 불안과 우울을 향해 집중하도록.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주는 연료가 된다.

즐거움이나 소소한 행복을 느끼려고 이런저런 태도나 행동을 취한다고 해서 ‘상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우울을 마음의 집 밖으로 내쫓으려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할 권리가 내게 있 걸까? <인사이드아웃>의 ‘슬픔이’처럼 모두가 반기지 않지만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일지도 몰라. 내 마음의 입주민인 거지. 아주 악착같이 자기 자리를 지키려 해.

오랜만에 불안의 서를 꺼내 들어 불안과 우울을 직면해본다. 큰마음 먹고 삼자대면을 하자. 그런데 800쪽이 넘는 분량은 너무하지 않아? 보기 어렵다… 보다가 잠이 들겠지. 그것도 좋아…….


마치 온실의 식물처럼, 나는 내 증오를 재배한다. 나는 삶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점이 자랑스럽다.     
부두, 오후, 바다의 냄새, 모두가 한꺼번에 내 깊은 불안의 합성물 안으로 몰려들어 온다. (…) 작은 강가에 펼쳐진 먼 전원 풍경이 한 시간 뒤 나를 다시 고통에 잠기게 만든다.
쓴다는 것은 망각이다. 문학은 삶을 무시하는 가장 기분 좋은 방식이다.     
체념은 해방이다. 원하지 않음은 능력이다.     
…세계, 본능적 힘의 똥구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빛을 받은 밀짚처럼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환하고 그리고 어두운 광채를 발한다.     


페소아의 글을 읽다 보면, 나는 그냥 내 삶이 우스워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하고.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거야.’ 어떤 이가 나에게 협박처럼 했던 말을 오래도록 떠올린다.

그럼 나는 이제, 도태되는 게 두렵지 않다고. 그건 당신의 불안이지 내 불안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당신 기준의 도태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난 도태되는 게 자랑스러워요. 페소아의 말처럼 세상은 망할 힘의 똥구덩이 같아.

블랙 유머는 가끔 우울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역시 내가 페소아에게 반한 문장은 불안의 서를 짧게 엮어 나온 『불안의 글』의 이 문장.     


하루도 빠짐없이 질료가 나를 학대한다. 내 감수성은 바람 속의 불꽃이다.


세상이 나를 학대하는 질료로 가득한 때에도, 바람이 불어도, 지지 않는 내 감정이 있다. 그것이 우울일지라도 치열하게 살아낸다. 어떤 이가 보기엔 우울은 절대 영도처럼 아주 차갑게 보일지 몰라도.

위태롭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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