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가장 잔혹한 문장들
이혼을 결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하며 살아왔는지를.
대출 없는 집, 아이들이 자라며 큰 부족함 없이 흘러간 시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물질뿐 아니라 마음의 여유, 사랑, 존중—그 모든 것이 거의 없었다는 걸.
소송을 시작하며, 내 손으로 쓴 소장을 읽다가 잠시 멈췄다.
그 안의 사실들이,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해서 충격이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나?’
그건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의 조각들이었다.
답변서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날,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변호사 언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나를 걱정하는 기운이 가득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녀가 “지금은 읽지 말아요”라고 했을 때, 왜 그랬는지 이제 안다.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마음을 다잡은 뒤 답변서를 펼쳤다.
첫 문장은 “이혼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그 아래로 이어진 문장은 차갑고 자기변호로 가득했다.
결혼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보다,
‘나는 유능하고, 사회적으로 바쁘고, 억울한 남자다’—그 문장만이 도드라졌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관계에서 나는 동등한 배우자가 아닌,
그저 ‘아이를 낳고, 집을 지키는 사람’일 뿐이었다는 걸.
기도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결혼을 유지하겠다는 말 속엔 사랑이 없었고,
가족에 대한 책임보다 자신의 평판과 체면이 더 중요해 보였다.
그 답변서 속의 ‘그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바쁘고 고결하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 잘난 사람의 인생에서, 단지 필요한 기능일 뿐이었다.
그날 밤, 저녁을 차려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이혼해줘.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은 내가 이렇게 살겠지만, 그 뒤는 모르겠어.”
하지만 돌아온 말은 냉정했다.
“기각 판결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대.”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무너졌다.
그는 이혼조차 ‘전략’으로 계산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지배야.’
“내가 9년 동안 시할머니를 모신 게 헛수고였냐”고 묻자
“그건 네가 좋아서 한 거잖아.”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이렇게 명확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제 안다.
헤어진다는 건 단순히 관계를 끝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밑바닥을 보고 나 자신의 착각까지 털어내는 일이라는 걸.
좋은 마음으로 끝낼 수 있다고 믿은 건 내 오만이었다.
나는 끝까지 실망해야만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 밤, 술 대신 초코칩 쿠키를 오물거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건 슬픔의 글이 아니라 정화의 글이다.
어쩌면 나는 이별이라는 방식을 통해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중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다시 중심을 잡는 힘이다.
불현듯 김건모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넌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준다며… 핑계를 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