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뒤, 그 결혼은 사라지고 나만 살아남았다
이혼을 결심한 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다. 내영혼을 강건하게 하기 위함이다. 저번 주 찬양예배가 끝나고 나가려는 데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진짜 신기한 경험이다. 보통 나는 안면인식장애라고 할 정도로 사람을 잘 못 알아본다. 그가 외모적으로 눈에 뛰나? 전혀. 아하! 바로 그 남성은 17년 전 결혼식에서 축의금으로 만 원 냈던 청년부 조원이었다. 그냥 만 원을 낸 게 아니다. 그 당시 교회 청년부 애들에게 크게 이렇게 떠벌렸다.
“청년부 떠나는 사람이라 어차피 내 결혼식에 오지도 않을 텐데 그냥 성의껏 만 원으로 통일해서 내자!”
그렇게 청년부 사람들은 당당하게 만 원 축의금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나마 나머지 분들은 ‘청년부 일동으로 5만원을 냈다. 17년 전 일인데도 적은 금액을 낸 게 충격이었는지 어제 있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지금 그는 어떤 가? 지금은 가족 네 명을 이끌고 찬양예배를 온 가장이었다. 진짜 그 애 말처럼 나는 그의 결혼식에 가지 못했다. 그의 자녀 나이대를 보니 10년 전후로 결혼해 가정을 꾸린 걸로 보였다. 아, 나는 이혼 중이었지! 쟤가 만 원을 냈던 얼마를 냈던 결국 그 결혼은 없어질 건데. 그럼 쟤는 만 원 정도 환불해줄 때 부담 없겠다. 근데 축의금이 환불이 되던가? 암암리에 축의금 부의금 명목으로 품앗이를 하지 않았던가?
누구를 위한 결혼인가? 이렇게 돈이 들어가면 결혼의 본질인 ‘사랑’은 퇴색하고 만다. 아, 철저히 내 기준이다. 결혼은 이 계약을 한 두 남녀 간의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이혼도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고 신뢰할 수가 없기에 결정했다. )결국 결혼 직전에 상대방의 신뢰가 없어졌다 거나 사랑하지 않을 때 그때 결혼을 파기하려 결정해도 이미 결혼을 하지 위해 들인 돈이 아까워서, 축의금이라는 형식으로 뿌린 돈을 회수하려고 결혼을 진행한다. 이 정도면 사람이 먼저인 건지 돈이 우선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근데 이 돈에 얽힌 결혼은 비단 요즘 문제만은 아니다. 과거에도 돈으로 결혼이 결정되고 돈을 통한 남녀의 결합과 비즈니스 역사를 충분히 많이 볼 수 있다. 사랑이 돈이 되고 돈이 사랑이 되는 기형적인 논리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여유로우면 본인 능력 닿는 대로 사랑에 빠진 서로 간의 상황에 따라 맞춰 나가면 되지 않을까? 난 양가 부모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부족하지 않게 가정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행하다. (상대적이지만) 돈이 있다는 이유로 행복하고 행복한 사람은 가정을 지킨다는 좁은 시야를 가지면 안 될 듯하다.
어쩌면 돈이 사랑을 잠식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돈은 사랑을 가리는 어둠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될 수도 있다. 원하는 이상형을 돈으로 유혹해 부부의 연을 맺을 수도 있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인가는 차치하고 말이다. 동물의 수컷 반 이상이 짝짓기를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잔인한 양육 강식의 세계에서 돈은 총각귀신을 막는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후 ‘퐁퐁 남’이란 비아냥은 덤이겠지만.
결국 나는 의도치 않게 사회 시스템인 ‘결혼’제도를 비판하는 사회 운동가가 되어버렸다. 졸지에 17년 만에 이혼을 앞두고 지금은 의미 없는 만원 축의금을 낸 청년부 동기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부디 그 아이의 결혼은 무탈하게 행복한 가정으로 유지되길 돈 대신 마음으로 빌어주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모두 내 이혼을 얘기했을 때 처음으로 한 얘기가 ‘돈’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관계를 금액화 한다. 그러나 나는 그 걱정을 무시하고 ‘무소유’삶을 선택한다. 사랑 없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 다시 사랑한다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서로가 존재하기에 감사하며 외관이 아닌 상대 영혼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런 삶을 갈고 싶다.
그렇다. 나는 하객을 축의금 액수로 기억하는 결혼을 끝냈다.
영혼으로 시작되는 진정한 관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