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
그리고 그걸 나도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통제’였다.
아빠는 친할머니, 그러니까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이렇게 기억한다.
“한 시간마다 생존신고하는 전화.”
학생이던 아빠는 공중전화에서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고, 그래서 항상 주머니에는 동전이 가득했다.
결혼 후에도 아빠는 엄마에게 똑같이 한 시간마다 전화를 했다.
엄마는 겉으로는 “귀찮다”고 말했지만, 그 전화는 묘하게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 모습이 나는 ‘부부의 사랑’이라고 배워버렸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애정 표현이 곧 *‘지속적인 연락’*이라고 믿었고,
결과적으로 통제가 강한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아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빠는 술에 취하면 전화 빈도가 더 늘어났고,
남편은 술에 취하면 아무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공포에 가까운 불안을 경험했다.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연락이 닿지 않으면, 나는 실제로 실종신고를 한 적도 많았다.
친정엄마 역시 통제적이었다.
그분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관리’의 언어였다.
엄마의 가장 잦은 불만은 이것이었다.
“동생네는 연락을 안 한다.”
“너라도 자주 전화해라.”
그 말은 늘 간접적인 압박이었다.
바빠서 연락을 못 하다 전화하면 “꼭 이럴 때만 전화한다”며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꾸중을 듣곤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아, 나는 엄마와 닮은 사람을 배우자로 데리고 왔구나.”
통제하는 부모 아래에서 자란 나는, 통제가 강한 사람을 오히려 ‘편안함’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결혼 후 남편의 통제는 더 강해졌다.
친정 부모 앞에서는 긴장했고, 그 긴장은 나를 향한 통제로 흘렀다.
“넌 왜 이렇게 하나를 빨리 못 하냐?”
“죄송합니다. 부모님, 제가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엄마는 그때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자신의 ‘통제형 그림자’를 사위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위가 사 온 선물을 보자 곧 마음이 풀렸다.
물질 앞에서 밀고 당김이 너무 빠르게 오가는 사람.
그게 내 엄마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애정표현’으로 오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몸으로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내 글을 검열하듯 전화할 때마다, 나는 실제로 목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각성했다.
통제는 사랑이 아니라 관계의 숨통을 조이는 구조라는 것.
그리고 그 통제 속에서는 누구도 성장할 수 없다는 것.
이후 나는 통제에 대한 감각이 날카롭게 깨어났고,
그걸 자각하자마자 내 ‘빛’이 다시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더 기이하게 흘러갔다.
이혼을 선언하자, 친정엄마와 남편은 마치 ‘추모식을 치르듯’
나를 제외한 채 둘이 계속 만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 두 사람은 결혼기념일에 함께 식사했고,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전했다.
“네 남편이 아직도 널 사랑한대.
이혼 좀 막아달래.”
한 달 전만 해도 “저런 남자는 나도 못 산다”고 했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말이 바뀌었다.
물질적 손익이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나는 드디어 소리쳤다.
“44년 동안 엄마 말 듣고 산 착한 딸이었어.
이제 제발 좀 내 마음대로 살게 놔둬!”
엄마는
“앞으로 대화도 방문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제발 그러시라.
하지만 며칠 뒤, 엄마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혼은 남편과의 이별뿐 아니라,
통제형 쌍둥이 같은 엄마와의 이별이기도 하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이 가장 평온하다.
혼자 남았지만, 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다.’
내 내면이 사랑으로 충만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통제가 아닌 진짜 사랑을 기다린다.
나를 함부로 누르지 않고, 나의 빛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
나를 자유롭게 빛나게 하는 본딩.
서로를 얽어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혼.
그 사랑을 위해, 오늘도 나는 해방된 마음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