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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선 Sep 08. 2023

빈말도 연습이 필요해

  '언제 밥 한 번 먹자.' 처럼 빈말인 줄 알면서도 주고 받는 말들이 있다. 나는 그런 빈말이 영 힘들다. 마음에도 없이 언제 한번 보자는 말에 꼭 그러자고 대답하는 게 거짓말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식사 하셨어요? 같은 질문으로 서두를 꺼내는 것도 번거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빈말을 전혀 안 하고 살 수도 없다. 인사치레의 교환이란 동물들이 만나면 냄새를 킁킁 맡아보는 것처럼 사람이 마주치면 으레 해야하는 사회적 인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머리를 잘랐을 때.

 내가 미용실에 가는 패턴은 허리께까지 쭉 기르다 어느 날 귀찮아지면 단발로 댕강 자르기. 그리고 다시 허리까지 기르기의 반복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단발로 자를 때면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잘랐네!' 하고 말 하게 되고 그 뒤에는 응당 '잘 어울려요!' 같은 빈말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빈말일 줄 알아도 매번 '어머, 감사해요.'하고 인사도 해야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속으로만 '음, 저 사람이 머리를 잘랐군.'하고 지나가줬으면 좋겠다.  혹시 당신도 나처럼 잘 못하는 빈말을 열심히 지어내고 있는 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라는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최근에는 또 오랜만에 단발로 머리를 잘랐고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머리 팀장에게

 "여자가 머리를 자르면 심경의 변화가 있는거라던데. 남자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한거야?"

 라고 남의 속 긁기 교본 1장에 수록되어 있을 것만 같은 대사를 듣고 말았다.


 세상에, 저건 또 뭐야. 정말 내가 머리를 자른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을거고, 남자친구랑 헤어진 건 아닌 지 걱정스러웠을리도 없고. 그러니까 어차피 저것도 빈말이다. 하지만 내 자른 머리를 보고 아무 말이나 던져야지 하고 떠오른 말이 저거라니 심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어차피 빈말이란 상황에 따라 대충 정해져있는 법. 즉 거기서 거기다. 아마 심경의 변화 어쩌구도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빈말이었을 것...

 [상황에 따른 적당한 빈말 135개 모음집] 같은 책이 출간되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저런 말을 내뱉는 상사가 되지 않으려면 빈말에도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사회적 교류를 위해 아무말 이나 던지는 게 빈말이라면 적어도 '대답하기 편한 빈말'을 던져야 서로 간에 아름다운 ‘빈대화’가 가능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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