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멍청한 일이지만 내 한국행 티켓이 일본에서 하룻밤을 머문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 비행기를 타기 전 날 저녁이었다. 나는 왜 항상 숫자를 제대로 읽지 않는 건지 아직도 모른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건 오후 5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건 내일 아침 열 시니 짧은 밤이지만 편안한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온갖 쇠붙이를 포함한 짐으로 가득 찬 100리터짜리 배낭에 8인용 텐트 한 동까지 매달고 있었다.
나름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거리낄 게 없었다. 일단 자신만만하게 항공사 카운터로 가서 나는 내일 떠나는데 커다란 배낭만 미리 맡길 수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다행히 짐은 맡길 수 있지만 ‘엔베로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엔베로뿌라는 것을 찾기 위해 항공사 카운터 앞에서 내 가방과 주머니 속을 다 뒤져서 꺼내 보여주었다.
한참만에 찾아낸 엔베로뿌(エンベロップ)는 내 항공권을 담아주었던 종이봉투 그러니까 envelope 였다. 거기 붙어있는 바코드가 필요했기 때문. 침착하게 생각했다면 조금 더 빨리 알아들었을 일이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전철로 한 정거장. 갈아입을 옷도 모두 공항에서 헤어진 배낭에 넣어 보내버린 탓에 입고 있던 짧은 반바지와 티셔츠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로 흔들흔들 돌아다녔다.
공항 근처 동네엔 서양인들이 넘쳐났다. 그 사이로 휘적거리는 동양인 여자애한테 던지는 캣콜링을 무시하고 시차 적응 실패로 지친 몸에 탄수화물과 알코올을 채웠다. 그리고 들르는 음식점마다 사장님을 붙잡고 내가 이주 동안 빵과 치즈만 먹다 오는 길이며 쌀밥과 국에 대한 내 유전자에 새겨진 사랑을 고백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맥도날드의 위치를 묻는 스웨덴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데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가 마구 섞여 나왔다. 그 어느 말도 다 겉핥기로밖에 못하니 생긴 실수다.
그가 나에게 함께 식사하기를 권하기에 쌀밥을 포기하고 함께 맥도날드로 했다.
마주 앉아 맥모닝을 먹으면서 이번에는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향형 인간인 내가 초면의 사람과 식사를 함께하거나 사사로운 이야기를 길게 나누는 일은 흔치 않다. 아마 낯선 나라의 거리가 주는 설렘과 그에 따라오는 긴장감이 한국과 비슷한 일본에 오니 좀 풀어진 탓일 것이다. 그게 생면부지의 라멘집 사장님을 반갑게 만들고 방금 처음 만난 사람과 겸상까지 하게 만든다.
하룻밤이 지나 다시 돌아온 나리타 공항에서는 창 밖으로 비행기가 늘어선 긴 복도를 지나는 길에 괜히 무빙워크가 아니라 내 발로 걸었다. 왼편엔 비행기가 늘어선 창, 오른편엔 사람이 늘어서서 정지한 채 흘러가는 무빙워크. 그 가운데에서 일본인 여자가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복도 옆 통유리창 밖으로 비행기가 보이게.
나는 터치 스크린에 쓸만한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가진 지 얼마 안 되었었기 때문에 핸드폰 카메라 사용이 서툴렀다. 다행히 그녀가 실내에서 밝은 창밖을 배경으로도 역광 없이 찍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 핸드폰을 받아가 내 사진도 똑같이 찍어주고는 '일본어를 잘하네요' 하고 말하며 싱긋 웃어주고는 떠났다.
사람들. 그 짧은 하룻밤 동안 만나고, 긴 대화를 나누고, 짧은 인사를 건넨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가 멋진 동행이 되어주는 세상. 메뉴판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면 바로 번역해 주지만 이방인들의 대화는 서툰 언어로 직접 오갈 때 괜히 마음이 실리는 것 같다. ‘엔베로뿌’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것도 나름 추억이 되었다.
여행 회화책을 들고 다니는 시절도 지났지만 여전히 여행길의 작은 즐거움 삼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이런 문장을 중얼거리며 외우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