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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선 Dec 31. 2023

도쿄. 이방인들의 대화

 꽤 멍청한 일이지만 내 한국행 티켓이 일본에서 하룻밤을 머문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비행기를 타기 전 날 저녁이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건 오후 5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건 내일 아침 열 시니 짧은 밤이지만 편안한 잠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는 온갖 쇠붙이를 포함한 짐으로 가득 찬 100리터짜리 배낭에 8인용 텐트 한 동까지 매달고 있었다.


 나름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거리낄 게 없었다. 일단 자신만만하게 항공사 카운터로 가서 나는 내일 떠나는데 커다란 배낭만 미리 맡길 수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다행히 짐은 맡길 수 있지만 ‘엔베로뿌’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엔베로뿌라는 것을 찾기 위해 항공사 카운터 앞에서 내 가방과 주머니 속을 다 뒤져서 꺼내 보여주었다.

 한참만에 찾아낸 엔베로뿌(エンベロップ)는 내 항공권을 담아주었던 종이봉투 그러니까 envelope 였다. 거기 붙어있는 바코드가 필요했기 때문. 침착하게 생각했다면 조금 더 빨리 알아들었을 일이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전철로 한 정거장. 갈아입을 옷도 모두 공항에서 헤어진 배낭에 넣어 보내버린 탓에 짧은 반바지와 티셔츠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로 흔들흔들 돌아다녔다. 공항에서 자신감을 잃고 조금 겸손해진 일본어 실력으로 저녁밥을 먹고 편의점에 들르고, 호텔에 체크인해 새하얀 잠옷과 푹신한 침대도 얻었지만 시차 적응 실패로 다시 밤중에 라멘집에 갔다.

 2주 동안 빵과 샌드위치, 햄버거와 피자만 먹다 오는 길이었다. 밥과 국물을 먹는 나라의 사람에게 ‘빵  말고 밥이 먹고 싶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너무 반가워서 부족한 일본어로 사장님과 한참 이야기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맥도날드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아 고전하는 스웨덴 사람을 대신해 일본어로 주문해 주었다. 그가 나에게 함께 식사하기를 권하길래 마주 앉아 맥모닝을 먹으면서 이번에는 영어로 일본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로 시작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극 내향형 인간인 내가 이렇게까지 남들과 신나게 떠드는 일은 흔치 않다. 아마 낯선 나라의 거리가 주는 설렘에 따라오는 긴장감이 한국과 비슷한 일본에 오니 좀 풀어져서 생면부지의 라멘집 사장님을 반갑게 만든 모양이다. 거기에 비행과 시차문제로 지쳐 살짝 멍한 머리가 안 하던 짓도 하게 만드니 방금 처음 만난 사람과 겸상까지 하는 것이다.


 하룻밤이 지나 다시 돌아온 나리타 공항에서는 창 밖으로 비행기가 늘어선 긴 복도를 지나는 길에 괜히 무빙워크가 아니라 내 발로 걸었다. 왼편엔 비행기가 늘어선 창, 오른편엔 사람이 늘어서서 정지한 채 흘러가는 무빙워크. 그 가운데에서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를 닮은 일본인 여자가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복도 옆 통유리창 밖으로 비행기가 보이게.

 나는 터치 스크린에 쓸만한 카메라가 달린 스마트폰을 가진 지 얼마 안 되었었기 때문에 핸드폰 카메라 사용이 서툴렀다. 다행히 그녀가 실내에서 밝은 창밖을 배경으로도 역광 없이 찍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 핸드폰을 받아가 나도 똑같이 찍어주고 '일본어를 잘하네요' 하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가 멋진 동행이 되어주는 세상. 메뉴판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면 바로 번역해 주지만 이방인들의 대화는 서툰 언어로 직접 오갈 때 괜히 마음이 실리는 것 같다. ‘엔베로뿌’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것도 나름 추억이 되었다.

 여행 회화책이 팔리는 시절도 지났지만 여행길의 작은 즐거움 삼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이런 문장을 중얼거리며 외우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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