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에 뭐가 보이네요.
수용성 젤리를 바른 배를 초음파 탐촉자로 문지르던 의사가 말했다.
여기 보이시죠? 지름이 사 센티미터가 조금 넘습니다. 현재 모양으로 봐서는 종양인 것 같은데, 건강검진으로 발견해서 다행이네요. 소견서를 써드릴 테니 종합병원에서 CT 검사를 받고 양성인지 아닌지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프로포폴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서랍에서 플라스틱 자를 꺼냈다. 사 센티미터는 오른쪽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큰 혹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비좁은 간에 버젓이 들어앉아 있었단 말인가. 이 혹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양성인가 악성인가. 삶인가 죽음인가.
며칠 뒤 찾아간 종합병원에서는 담당 내과의의 진료를 한 번 더 받아야만 CT를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종양이 발견된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진료비를 또 내고 수납을 두 번 해야 하는가. 불합리한 과정이 괘씸했으나 나는 간에 약점이 잡힌 환자이므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두 번은 듣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가 새로운 의사의 입에서 주말 오후의 드라마 재방송처럼 흘러나왔다.
정확한 지름은 사점 삼 센티미터입니다. 상당히 큰 편이에요. 일반적으로는 수술이 필요 없는 혈관종인 경우가 많지만, 드물게 병변이나 경화로 진행되는 악성일 가능성도 있어요. CT를 찍어봐야 어떤 성질의 종양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어요. 평소에 음주하세요?
아뇨.
가족 중 간질환 병력을 가지고 계신 분 계세요?
없습니다.
이전에 간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있으세요?
아뇨.
그럼 악성으로 번질 확률은 낮은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이렇게 크기가 크죠?
...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가요?
젊은 의사의 문진이 탐탁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간에 혹을 기르고 있었던 거냐며 비난하는 말투로 들렸다. 선생님, 저는 내 몸뚱이에 이물질을 남기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 온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입니다. 건강제일을 가훈으로 지켜온 제 몸에 왜 당최 이딴 동그라미가 나타난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니라고 이 양반아.
의사의 멱살을 잡아당기는 상상을 하면서 진료실을 나왔다.
CT 검사를 받기 위해서는 다시 열흘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독이었다. 어린이책 전문 서점에 들러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샀다. 길가의 보도블록을 한 개씩 세며 되뇌었다. 내 종양은 양성이다, 악성이다, 설마 하니 양성일 거다, 아니야 악성이다... 아무튼 나에겐 창문 밖에 나무를 그려 줄 사람이 없으므로 아직 죽어서는 안 돼.
토끼가 자라에게 결국 제 간을 내주었는지 안 주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별주부전>도 꺼내 들었다. 이 사기꾼 자라 녀석 같으니라고. 우리 불쌍한 토끼가 간을 잃을 뻔했네. 아무튼 나는 토끼만큼 영민하지 못하니까 아직 죽어서는 안 돼. 고작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 한 녀석 때문에 삶이 헝클어진 것이 원망스러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므로 출근 후엔 줄곧 인터넷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간에 종양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팔도에 천지라는 것이 의외였다. 포털 사이트에는 간 종양과 함께 살아가는 커뮤니티도 운영되고 있었다. 칠 센티미터가 넘는 양성 종양과 함께 평생을 오손도손 살고 있는 동지, 겨우 이 센티미터의 종양임에도 악성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해야 했던 동지들의 이야기에 감복하여 뜨거운 위문편지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우 여러분,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간을 잃을 수 없습니다. 종양 놈들과의 싸움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부디 만수무강합시다 여러분.
그러나 밤마다 간병변, 간경화, 간암 따위의 활자들은 갑옷을 입고 꿈에 나타나 내 이마에 칼을 들이대며 외쳤다. 내 너의 간을 접수하러 왔노라!
처음으로 받아 보는 CT 검사는 충격적이었다. CT를 찍기 위해서 필수로 투여해야 한다는 조영제의 사용 동의서에는 끔찍한 단어들이 가득했다.
'조영제는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나 가려움, 메스꺼움, 구토, 호흡곤란 등의 경미한 부작용과 아주 드물게 쇼크, 심부전, 심장마비 등의 심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불의의 사고 시 합법적인 절차에 따를 것을 서약하며 조영제 사용에 동의합니다.'
종양이고 자시고 그전에 조영제가 사람 죽이겠네요. 하기사 내가 죽으면 종양도 같이 죽는 거니까 깔끔하네. 죄 없는 간호사에게 이죽댔지만 사실은 두 무릎이 부딪히도록 떨렸다. 검사대에 눕자 투명하고 끈적한 조영제가 튜브를 타고 온 몸에 퍼져 나갔다. 몸이 뜨거워질 것이라는 간호사의 경고대로 순식간에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사타구니에 불이 나고 발가락이 찌릿찌릿했다. 몸의 피가 죄다 몰려 발톱이 빠질 것 같았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도 병원에서 합법적인 절차로 처리해 주겠지. 화장터의 불구덩이가 빨아들이는 시체처럼 CT 촬영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CT촬영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주일은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시장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꼬들꼬들하게 삶아져 나온 순대와 돼지 간을 쩝쩝대며 먹는 친구들을 보자 갑자기 구역이 났다. 이런 야만인 새끼들아, 너네는 간이 맛있냐? 남의 간이 맛있냐고. 나는 니가 먹는 간이 지금 내 간 같다고 이 놈들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였으면 기름진 음식도 많이 먹고 다이어트도 하지 말 걸. 내가 그동안 술이라도 많이 처먹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시발. 돼지 간이나 먹는 너희들도 다 똑같은 새끼들이야. 이런 간만도 못한 새끼들아 엉엉.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친구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야 너 죽는대? 왜? 병원에서 뭐래? 정신이 조금 든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게.... 아직 검사 결과 안 나왔어.
죽음은 평등하다.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사람과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서른, 죽음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했던 나는 비로소 삶이 보였다. 내가 사라지면 남겨질 사람들이 생각났다.
혈관이 뭉쳐 생겨난 종양으로 판정이 됐고요, 양성이므로 건강에 영향이 없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술도 필요 없어요. 일 년에 한 번씩 검진하시면서 크기가 커지는지 추이만 지켜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막걸리를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푸아그라를 안주로 시키고 세상의 간이란 간은 죄다 잘근잘근 씹어 먹어버리고 싶었다. 꿈에서 죽음의 얼굴을 보았다. 죽음은 방문을 열고 터벅터벅 걸어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대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에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다시 오세요. 죽음이 살풋, 웃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