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떠났다.
급하게 휴가를 내고 닷새만에 북해도로 날아갔다. 이대로 서울에서 실연의 후폭풍을 견디다가는 병원에 실려가거나 무서운 생각을 할 것 같았다. 기록적으로 추운 겨울이었지만, 더 추운 곳으로 가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비워낼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나 신치토세 공항에서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지난 삼십 년 간 보아온 폭설의 수준이 아니구나.
차도와 인도에는 보도블록 아래에 열선이 깔려 있어 눈이 자동으로 녹는다. 그러니 사람과 차가 지나지 않는 곳에는 눈이 가슴께까지 쌓인다. 그러니, 열선이 없는 곳에 쌓인 내 키만 한 눈산을 양쪽에 두고, 미로와 같은 인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쌓인 눈 때문에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뚜껑만 겨우 보였다. 만화 세상 속으로 끌려온 듯했다. 눈은 일 분쯤 내렸다가, 일 분쯤 잠시 멈췄다가, 다시 삼 분쯤 퍼부었다.
JR 삿포로역에서 내리자마자 도시 전체를 휘감은 기이한 냄새가 느껴졌다. 삿포로의 명물인 수프 카레의 향이다. 인도의 커리는 그렇게 한국에서 3분 레토르트가 되고, 북해도에서 수프가 되었다. 눈산을 헤치고 호텔에 도착했다.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부츠가 이미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었다. 짧게 샤워를 하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가고 싶은 수프 카레 식당이 있었는데 사방의 눈 때문에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다. 동쪽도 하얗고 서쪽도 하얗다. 저 멀리 걸어가는 직장인(처럼 보이는) 아저씨에게 위치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콧수염을 두텁게 기르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는데 뭔가 이상했다. 그의 머리가 흑발인데 수염은 금발이었다. 머리를 염색한 것인가 수염을 염색한 것인가.
스미마셍, 이 근처에 유명한 수프 카레집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질문을 마치자마자 깨달았다. 그는 아무것도 염색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려고 했던 수프 카레집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선 참이었고, 카레를 사발째 들이켰는지 콧수염을 수프 카레에 흠뻑 적셨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그의 빽빽한 수염은 카레 색을 유지한 채 순식간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카레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그의 온몸에서 수프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길을 알려주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마운 분 앞에서 비웃음을 지을 수는 없다. 폭소를 참기 위해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고 싶었지만 이 추위에 그랬다간 내 허벅지가 두 동강이 날 것 같았다. 아저씨는 그 식당에서 야채수프 카레를 꼭 먹어보라며 추천해 주었다. 네 그럴게요, 그러니까 그 콧수염이 야채 국에 담겨 있었던 거였군요.
그 이후 북해도에 몇 번을 더 갔다. 맥주 축제가 열리는 여름의 삿포로도 물론 즐거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북해도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항상 그 수염을 먼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