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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y 13. 2020

어떤 물로 드릴까요?

평범한 중산층의 장녀로 태어나, 평범한 책가방을 메고, 평범한 학교 컵떡볶이를 먹고, 평범한 아이돌을 쫓아다니며 자랐다. 문화에 대한 얕은 지식은 성인이 된 후 자비로 많은 곳을 다니고 많은 음식을 먹어보고 많은 책을 읽으며 쌓아 올린 것들이다.


지인이 얼마 전에 부라타 치즈를 처음 먹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부라타에 올리브 오일과 후추를 뿌려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부라타의 존재를 모두가 알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부라타 따위 먹지 않아도 앞으로 더 있다. 그는 샤퀴테리가 뭔지 아냐고도 물으며, 자신은 친구가 주문한 메뉴가 나올 때까지 그 정체를 몰랐다고 했다. 나는 먹는 걸 원체 좋아해서 아는 것일 뿐, 샤퀴테리나 이베리코 하몽 따위를 몰라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일 수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먹어본 것들과 알고 있는 지식에 대비해 나의 삶은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대학생 때 사귄 남자친구의 집은 역사와 전통의 부자였다. 그의 조부는 네이버 인물검색에 올라와 있는 분이다. 조부의 이름이 언급되는 역사책도 종종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출생이 외국인 남자친구는 성장 과정에서 한국에 머문 시간이 극히 적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나보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랐을 것이다. 세계 문화 정치 역사와 서양식 테이블 매너에 대해서도 당연히 나보다 더 익숙했다.


어느 기념일이었다. 남자친구가 남산 중턱의 초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에 나를 데려갔다. 당시의 나는 스물두 살, 오전 강의가 끝나면 점심으로 학교 후문에서 부대찌개를 먹을 생각에 설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언감생심 프렌치라니. 자리에 앉자마자 끝도 없는 포크와 나이프, 물 잔의 개수에 압도되어 버렸다. 그는 랍스터와 텐더로인 스테이크, 관자 요리 같은 것들을 시켰다. 나는 알파벳이 뛰노는 메뉴판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주문을 마치자 웨이터가 나에게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어보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직접 갈아주는 것이 아니면 주스도 잘 안 마시고, 탄산음료도 웬만하면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물 주세요,라고 했는데…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웨이터가 다시 물었다.


- 어떤 물로 드릴까요?


물을 사서 먹는다는 개념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아리수 말고 또 다른 물이 있나. 어떤 물을 원하냐니, 나는 혼란스러웠다.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제일 유명한 생수 브랜드는 삼다수였다. 그러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삼다수가 웬 말인가. 나는 조금 생각했다.


- 음... 에비앙이 있나요?


- 저희 레스토랑에 에비앙은 없습니다.


야속한 사람. 먼저 제안을 해줄 순 없던 거였을까? 어린 손님이 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만 보았다.


- 그렇다면...혹시...페리에에에는...?


- 죄송한데 저희는 페리에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환장할 지경이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이까짓 물 때문에 이렇게 남친 앞에서 쪽을 팔려야 하는 걸까? 여전히 웨이터는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에비앙 말고 페리에 말고 다른 물이 뭐가 있는지 손님에게 알려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침묵의 시위를 하다가 아는 생수 브랜드 세 개가 모두 탈락한 내가 먼저 되물었다.


- 그럼... 여기엔 어떤 물이 있나요?


- 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산펠레그리노는 어떠신가요?


그 시절에 산펠레그리노 브랜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사대문 안에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산펠레그리노를 추천하고 싶었다면 스파클링 워터가 괜찮은지부터 물어봤어야 했다. 웨이터는 그냥 스무고개 놀이를 원했던 걸까?


우여곡절 끝에 물을 시키고 고기를 씹었지만, 쪽팔림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날 이후 나의 '먹는 자아'는 크게 각성하여 미식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다. 친구의 부라타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물 브랜드를 모르는 것이 창피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생수 브랜드를 모르는 것이 죄인가? 그때 우리 집은 웅진코웨이 마셨는데? 아무튼 그 일을 겪고 나는 현재 아시아 최고의 생수 전문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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