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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y 20. 2020

내가 태워 줄까?

외국에 살던 어린 시절, 불꽃놀이를 보러 집에서 혼자 근처 해변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잰 걸음으로 걸어도 족히 한 시간은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갈 때는 어찌어찌 걸어갔지만, 불꽃놀이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문제였다. 늦은 밤의 도시에는 버스가 끊겼고, 길거리에서 손을 들어 잡아야 하는 택시에는 다른 불꽃놀이 관람자들이 이미 승객으로 타고 있었다. 방황하다 지쳐 급기야 히치하이킹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캘리포니아처럼 우리 주도 히치하이킹이 불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와,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법이었다. 


히치하이킹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부츠 신은 오른쪽 다리를 뻗고 엄지 손가락 내밀며 긴 머리를 흩날리는 미녀가 멈춰 선 미남의 재규어 컨버터블을 타고 사막을 벗어나는 일. 그건 그야말로 싹수 없는 꽃미남 재벌 2세와 사랑에 빠지는 수준의 상상에 불과하다.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 두 명은 여행 중 히치하이킹을 했다가 실종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평생 새우 껍질을 벗기며 살아야 하는 원양어선에서 등이 새우처럼 굽어버린 나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 후 포틀랜드에 갔다. 체크인을 마친 게스트 하우스는 경치가 좋은 대신 도심에선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운타운까지는 숙소 앞을 지나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당시의 포틀랜드는 시골이었고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마을은 더 시골이었다.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밖에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정원에 발을 딛자마자 바로 한 대짜리 버스가 내 눈앞에서 출발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우사인 볼트가 되어 가방을 이고 뛰었다.


한 정거장에 가까운 거리를 버스를 쫒아 달렸다. 뛰는 와중에 손도 크게 흔들고 소리도 질렀던 것 같다. 분명히 백미러로 나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버스 기사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일 분 일 초가 소중한 여행자인데 시내까지 나가기 위해 한 시간을 또 기다려야 한다니. 분노에 지쳐 길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순간, 소형차 한 대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짧은 은발의 여자가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 네가 계속 뛰어온 거 봤어. 내가 태워 줄까? 


불꽃놀이의 밤과 히치하이킹 괴담이 다시 생각나고, 머릿속에서 새우 등껍질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살펴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뒷좌석에서 초등학생만한 체구의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개를 키우는 사람은 나쁘지 않을 거야. 개도 거뒀는데 설마 사람을 내치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건 내가 히치하이킹한 게 아니라 합석을 제안받은 거잖아? 나는 극도로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고 일단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디까지 가니,라고 묻길래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 저 버스를 추격해 줘.


왜 시내로 가줄 수 있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 때의 마음은 저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여자의 차는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버스를 추월하여, 다음 정거장에 버스보다 먼저 나를 내려주었다. 기어이 버스에 올라타 기사를 한 번 째려봐 주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마쳤다. 이름 모를 여자분, 고마웠어요. 목적지가 원양어선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 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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