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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rgundy Jan 20. 2021

[영화] <작가미상>(2018)과 게르하르트 리히터

영화 포스터. 국내에서는 독일어 제목인 Werk ohne Autor 를 직역해 작가 미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오늘은 폴로리안 헬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Werk ohne Autor)>(2018)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타인의 삶>(2007)이라는 영화를 흥미롭게 보신 분이 있다면 같은 감독의 작품인만큼 믿고 관람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189분짜리 영화인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보시는 것을 추천드리고요. 그렇지만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는 완성도 높은 영화랍니다. 이 영화는 독일의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의 삶을 다룬 전기적 작품이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되 일부 요소들은 영화적 요소를 위해 과장되거나 각색되었다고 하네요. 감독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인터뷰를 하며 영화를 기획했지만, 리히터는 자신의 인생과 작품세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 ‘쿠르트 바르네르트’(Kurt Barnert, 톰 쉴링)라는 가상의 인물로 영화가 진행됐습니다. 영화에 등장한 작품들은 실제 그의 작품은 아니고, 리히터와 함께해 온 어시스턴트를 섭외하여 그의 화풍에 근접하게 그린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모와 함께 전시를 보러간 어린 쿠르트. 대학생이 되어 그림을 그리는 쿠르트.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시대부터 분단시대를 아우르는 동독에서의 삶을 조명하고 있고, 후반부에는 서독으로 넘어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조현병 환자인 이모에게 영향을 받은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데요. 이모 엘리자베스는 나치의 폭력적인 우생학 정책으로 불임 수술을 받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이모는 “진실로부터 결코 눈을 돌리지마(Never Look Away),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가족과 이웃들을 대거 잃게 되죠. 이후 그는 대학생이 되어 드레스덴 미술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유일한 미술로 인정받았으며, 피카소, 몬드리안, 파울 클레를 비롯한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폄하했습니다. 그곳에서 패션과 학생인 엘리(폴라 비어)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둘은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 서독으로 탈출합니다. 쿠르트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올리버 마수치) 교수를 만나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되는데요. 그는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를 모델로 한 인물입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요셉 보이스에 조언을 듣고, 쿠르트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자신만의 화풍을 시작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나온 이모와 자신의 사진을 기반으로 한 작품 / <Aunt Marianne>  1965


영화에서 나온 자신의 아내를 그린 누드 작품 / <Ema (Nude on a Staircase)> 1992


쿠르트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가져온 사진, 혹은 개인이 소장한 사진을 소재로, 형태는 흐릿하게 처리한 작품을 초기에 제작했습니다. 프로젝터를 이용해 사진을 캔버스 위에 두고 형태를 모사한 뒤, 기존 사진의 색에 기반하여 채색을 하고, 물감이 모두 마르기 전에 미세한 붓질을 반복해 번지는 효과를 입혀 이미지의 경계를 없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진이 가지는 특성에 붓질을 더해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선보인 것인데요. 혹자는 이를 ‘사진 회화(photograph painting)’이라고 부르며, 사진과 회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구상화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대상의 경계 부분을 뿌옇게 처리하여 추상화처럼 보이도록 하는 스타일을 고안하였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주목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그만의 특유의 뭉개기 기법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보면 붓자국이 또렷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작품은 흐릿해진 기억을 상기시키게 하는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독에서 벽화를 비롯해 초상화 그리는 것으로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풍경, 인물, 정물, 누드 등 대상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후 방대한 추상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규정적이지 않은 것을, 제약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리히터가 한 말입니다. 이념의 차이로 가족과 이웃을 잃은 그는, 정치 이념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의 이념 역시 끊임없이 탈피하고자 했습니다. 하나의 양식을 강요하거나, 반복, 재생산하지 않는 대신, 그는 지속적으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등 경계를 넘나들며 회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그의 작품세계를 떠올리면서 이 영화를 한 번 감상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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