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인으로서 야근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옛날 옛적 군 전역한 남성들이 자신이 겪었던 군대 무용담을 멋들어지게 늘어놓았던 것 처럼 한국 직장인에게 야근에 대한 무용담을 꺼내자면 전 세계 어느 나라 국가 대표 저리 갈 만큼 할 말이 많은 주제가 아닐까 싶다.
내 나이 21살, 대학생 1학년을 마치고 다음 해 등록금을 벌어볼까 해서 휴학 후 1년 계약직으로 일 한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두고두고 곱 씹을만 한 이야깃 거리다. 웹 에이전시라고 말은 거창 하지만 직원은 단 세 명 밖에 없었던 작은 오피스텔 사무실이었다. 대학생 신분인데다가 계약직이기 때문에 나보다 일을 오래한 사수라는 사람이 잘 가르쳐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 사수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그 회사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혼자서 일을 하나씩 해내는 걸 본 사장은 생각보다 일을 잘 한다고 판단했는지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전 다뤄보지 않았던 일을 주기 시작했다. 한 달 쯤 되었을 때 사장은 일을 더 주다 못해 이번엔 한국 10대 기업이라고 꼽힐 만한 기업의 웹 사이트 수주를 따온 것을 나에게 맡기니 말이다. 컨셉 포함, 3달 내에 모든 홈페이지를 완성하라는 말도 안 되는 살인적인 스케줄.. 집에 이틀에 한번씩 들어가며 밥 먹듯 야근한 경험은 졸업하고 나서도 웹 에이전시로 취업하고 싶은 마음을 싹뚝 잘라가 버렸다.
뉴질랜드는 야근을 권유하지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주 40시간, 오전 9시에서 5시까지 근무시간 내 직원들은 퇴근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짝 일을 하느라 바쁘다. 한국에서는 높은 직급의 직원이 먼저 퇴근을 외쳐야 퇴근할 수 있는 반면, 마음대로 집에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직원들은 정시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퇴근해 버린다. 정 반대로 직급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회사에 제일 오랫동안 남아 있는데, 직급이 높을수록 더 복잡하고 일이 많아지니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야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오후 9시, 예능과 미드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면 매번 새벽 1시를 넘겨 잤던 한국의 생활 패턴을 마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야근이 없는 뉴질랜드의 저녁은 '잠'에 투자하기 바빴다. 잠을 끝 없이 자도 매번 피곤한 무기력함은 한 두 달이 지나도 좀 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부터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출근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야근이 없으니 매번 오락가락 하던 수면 패턴을 드디어 되찾은 느낌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야근을 하는 일은 1년에 손에 꼽 힐 정도다. 한번은 다른 팀의 요청으로 저녁 7시가 넘도록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매니저는 내가 퇴근 한 줄 모르고 자신이 먼저 퇴근 했다가, 내가 여태껏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저녁을 사 가지고 다시 회사로 출근 해 주었다. 저녁을 배달 해 주다니, 왠지 사려 깊게 대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다른 팀의 매니저였다. 그 매니저에게 수화기 너머로 내가 혼자 야근 하고 있는 거 알고 있냐고 말하면서 얼마나 일을 많이 준 거냐며 컴플레인을 걸었다. 우리 팀 직원이 이렇게 예상 치 못하는 야근을 하도록 일을 맡긴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 다음 날, 다른 팀 매니저가 내 책상에 찾아와서는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해야되는 것인지 몰랐다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 날 다른 팀의 직원들까지 다 모아서 다 같이 야근을 해서 빨리 끝내도록 일정을 조율 해 주었다. 직장 매니저가 나를 위해서 다른 매니저에게 맞서는 행동에 감동이 실로 느껴진 순간이었다.
위의 글은 올해 발간 된 책 <나는 뉴질랜드에서 일한다>에서 발췌, 편집하고 수정한 글입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