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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Hannah Mar 18. 2024

고통은 나눌 수 있나요.

치유의 글쓰기

여러분에게서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처럼 1.5세로 한국어 글쓰기를 하는 분이라는 소개였는데, 분명 선생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어떤 분일까 궁금해하다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시원시원하게 써 내려간 글은 분명 제가 동경하는 문체의 힘이 있더군요.  A4 한 페이지 채우기도 끙끙되는 제게 선생님 글은 짧지 않은 길이에도 단숨에 읽혔어요. 거기에 제가 넘볼 수도 없는 스토리가 탄탄한 소설이라니요.

누군가에게 관심을 두면 만나는 일이 선물처럼 생기는데 선생님과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지나 기대하던 중이었습니다. 약속날을 기다리다 사정이 생겨 만남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번도 뵌적 없는 분에게 편지로 먼저 인사 드립니다.

저는 요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는 고통 받는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곁’이라고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스스로 고통에 매몰되면 경험이 아니라 고통에 관한 일방적인 호소만 이뤄지니까요. 타인이 되어주는 ‘곁’ 역시 언젠가는 부재하기 마련이고 때론 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 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당사자의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고요. 스스로 자신의 ‘곁’이 되면서요. 작가는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글쓰기는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해명하고 납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으면서 남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글인 것처럼요.

조각난 마음과 부서지는 영혼을 주어 담을 수도 없는 고통의 시간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작업은 글쓰기로 가능했습니다. 물속에서 머리가 눌린 채 숨을 참아야 하는 형벌처럼 고통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그 순간을 버텨낼 방법이 글쓰기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무기력해져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때도 머릿속에서 문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견디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글쓰기가 구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글쓰기로 몇 번이나 살아났습니다. 비통한 신음이 온몸으로 터져나가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시립니다. 하지만 적어논 문장으로 고통을 겪는자에서 벗어나 나를 타자화 하며 고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통해 내가 나의 ‘곁’이 되었던 경험이었지요. 글 하나를 완성하는 일은 고통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저만의 다짐을 부르는 의식이 됩니다. 어쩌면 글이야 말로 고통과 슬픔을 말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닐까요.

누구보다도 선생님은 지금 그런 날들을 치열하게 보내고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쓰는 사람에게 고통은 나쁜 것만은 아닐 거예요.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한 시간이 써 내려간 글에는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깊이가 있으니까요. 심연 깊은 곳에서 발견한 선생님만의 문장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이 제안했다는 <치유의 글쓰기> 수업을 맡아 준비 하고 있습니다. 분명 선생님은 글쓰기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분이겠죠. 글의 힘과 다정함을 아는 사람의 내면의 힘을 헤아려봅니다. 그 힘으로 살아나 꾹꾹 눌러쓴 선생님의 문장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글이 훨훨 날아 선생님뿐 아니라 다른 이의 비통한 마음도 만져주고 다시 살아나게 할 테니까요.

머지않은 날에 만나뵙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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