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날들의 기록
요즘 딱히 재미있는 책이 없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이오덕 선생의 <우리 글 바로 쓰기> 그 유명한 <총. 균. 쇠>, <코스모스>를 소개하며 재미있는 책이 없을 땐 아예 미뤄 두었던 재미없는 책을 재미있게 읽어보라 제안했다. 이후 몇 권을 더 추천해 주었는데 관심 가는 제목은 아니었다. 나의 반응을 눈치챈 그는 남궁인의 <지독한 하루>를 마지막으로 추천했다. 이만큼 소설 같은 수필도 찾기 어려울 거라 더했다.
남궁인, 나는 이 젊은 의사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다. 이화여대부속목동병원 응급의학과 임상조교수인 그는 여러 권의 책을 냈고 SNS에서도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응급실 의사가 쓴 글은 생생한 병원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생사가 엇갈리는 응급실에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의사의 심경이 그대로 전해졌다. 밀려오는 환자들을 기계처럼 받아내야 하는 전쟁 같은 일상에 온기를 잃지 않는 젊은 의사에게 경의로움이 생겼다.
한동안 그의 글을 읽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그의 글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처럼 그의 글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지독한 하루>를 펼쳤다. 이 책은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 응급실을 생생하게 그린다. 그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가장 지독하고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던 지난날 어떤 하루가 겹쳤다.
한밤 중 쓰러진 A를 실은 구급차를 함께 타고 병원으로 향할 때, 희곡의 한 장면 안에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우리와 가장 상관없을것 같았던 이야기로 진저리 칠 때 구급차 안의 딱딱한 의자와 한 겨울의 시린 공기가 이것이 지독한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이내 표정 없이 누워있는 A를 보며 그의 몸이 죽어갈까 안타까웠다. 코로나로 인해 부족한 응급실 상황에 여기저기 헤매던 구급대원들이 보호자로 따라온 내게 ‘이대목동 응급실’로 갈 거라고 일러주었다. 예상보다 조용했던 응급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능수능란하게 A를 데려갔다. 갑갑하게 내려진 불투명한 보호막이 A의 침대를 감싸고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했다. A가 죽어가는 그곳에서 나는 젊은 의사와 그의 글을 떠올렸다. 이 병원에 일한다는 그가 다가와 글에서 처럼 다정하게 A를 살려내길 바랐다.
의식이 깨어난 A는 입원권유를 만류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다시 고통을 호소한 그는 결국 병원을 가고자 했다. 하지만 첫 진료일이 한참 후로 잡혔다. 나는 A가 이 병원 응급실 환자였던 것과 응급실 의사의 입원권유가 있었던 것을 강하게 전했지만 병원은 진료날짜를 앞당겨 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사정했는데 전화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동일하게 사무적이었다. 나는 그때 그 젊은 의사를 다시 떠올렸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찾아가고 싶었다. 이 병원 응급실 환자였던 우리에게 병원이 이렇게 지독하게 굴 수 있는 거냐고 그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시간에 나는 다른 병원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글이 과시하는 저자에 대한 환상을 경멸했다. 글로 쌓인 저자와의 외롭고 일방적인 내적친밀감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의 책 홍보문구처럼 ‘끝없는 피로에 시달리면서도 초인적인 힘으로 환자의 곁을 지키며 눈밭을 형형하게 빛내’는 의사가 있는 병원. ‘아무리 지독한 피로가 강박처럼 몰려오는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환자의 이마를 다정하게 짚어주며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아프고 외로울 환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놓지 않는’ 그가 있는 이 병원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를 외면했다고 단정했다. 그의 글로 부풀려진 병원 이미지의 책임 또한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병원의 실태를 모를 리 없다고 원망했다.
A는 찾아낸 다른 병원에서 건강을 회복해갔다. 이후 그 의사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기대감에 그에게 다가갔거나 다가가고 싶을지 헤아려 보았다. 그럴 때마다 곤욕을 치를 젊은 의사와 그의 글에 내심 미안했다. 그럼에도 <지독한 하루>는 읽기 힘들었다. 수많은 환자의 사연과 병명의 등장으로 지독한 그날이 떠올랐지만 책 속의 글과 나의 고통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을 죽음에서 떼어내려는 긴박한 과제를 업으로 가진 그에게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 젊은 의사가 있어 다행이다. 예고 없이 닥치는 운명의 가혹함을 함께 저항해 주는 그의 간절함이 많은 생명을 살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활자가 그가 생에서 의미를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응급실 의사의 고유한 시선으로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에 매몰된 시간, 언어조차 떠나가버린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의 고귀한 하루를 기록한다. 그것이 그의 글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느리게 나아가는 황홀한 활자의 세계를 유영한다.” 이제는 그의 다음글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