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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섬 Jul 02. 2016

<새벽 두시 전화벨> 4화

가끔은 후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매일매일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아가는 소심한 서른 살의 나는, 그래서 대범한 사람들이 부럽다. 빠른 판단력, 뒤돌아보지 않는 실행력, 일의 결과에 빠르게 책임지는 자세, 실패를 웃어넘기고 다시 다음 일로 넘어가는 결단력. 저 중에 단 한 가지도 가지지 못한 나는 저 모두를 가진 이에게 동경과 경외를 느끼곤 한다 


나의 외숙모 이야기다 


아들이 사준 노트같이 큰 핸드폰에 달려있던 펜으로 메모를 하고 펜을 다시 구멍에 꽂으려 하던 외숙모는 순간 당황했다. 펜이 구멍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대지의 기운과 하늘의 힘을 손가락에 모아 펜을 집어넣으려 했지만 펜의 끝부분만 조금 들어갈뿐 펜은 요지부동이었다. 


소심한 나 같으면, 더럭 겁을 내며 펜을 조심조심 들어올려 다시 빼냈겠지만 인생에 후진은 없는 외숙모는 망치를 가져와 펜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망가질까봐 ‘살살’ 두드렸다고는 한다) 


다음날 그녀는 AS센터 수리기사 앞에 앉아있었다. 손녀가 장난치다가 펜을 망가뜨렸다는 비도덕적 변명과 함께. 자애로운 수리기사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손녀가 힘이 천하장사네요” 


인생에 가끔은 후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랬으면 그녀는 수리비 5만원을 아꼈을 것이다. 


(by TEAM "PLAN S", 글: 서은호 / 그림: 한섬)

<새벽 두시 전화벨> 4화 - 가끔은 후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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