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같이 일하고 싶으면 웃돈을 줘야죠
“너, 3년차가 핫하단다”
내가 만 3년차를 채워가고 있을 때쯤, 사회의 많은 점순이들이 나에게 봄 감자 같은 유혹을 건넸다. 한 팔랑귀 하는 나니까 자소설 좀 써보기로 했다. 더 큰 물에 가서, 더 다양한 광고 카피를 써보고, 더더욱 큰 물로 가는 것. 그런 야무진 꿈 같은 걸 나도 한번 꿔 보기로 했다.
떨어졌다. 꿈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썼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어떤 광고 회사였는데, 훗날 더 큰 물로 도약하기에 좋은 획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면접은 보지 않았지만, 이미 그 회사의 다음 회사까지 머리 속에 그려 놓았다. 멋있었고, 나는 힘껏 준비해 보기로 했다. 사전 과제도 열심히 밤을 새서 끄적였다. 골이 띵할 정도로 피가 말라가는 것 같았지만 내 미래는 멋지니까, 이 정도의 무리는 괜찮았다. 면접 날 그나마 제일 멀끔한 옷을 골라 입고 택시를 탔다. 지하철을 타고 걷고 또 걸어서 땀에 찌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조만간 같이 일 할 사람들인데 말이다!
면접관들은 지쳐 있었다. 아마 못 잤겠지, 광고계라는 게 그렇지, 하지만 좋은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최대한 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곤한지 별 달리 나에게 궁금한 점이 없어 보였다.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본부장님이 보고 싶어 하신다고, 이것 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붙은 건가요?” 했으나, 인사팀은 애매하게 답변하며 말을 아꼈다.
본부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나를 작고 어두운 회의실로 불렀다. 그리고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너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 지금 당장 뽑으면 되지 않나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회적인 체면을 위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 분의 표정은 익숙한 표정이었다. 광고주의 표정. 정확히 말하면, 견적이 부족한 광고주의 표정. 사회에서 대부분의 곤란은 돈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버린 3년차였다.
사실 저 표정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짜기로 유명한 회사였고, 솔직히 내 연봉에서 100까지는 견뎌 볼까도 생각했었다. 더 큰 미래를 위해서. 하지만 정말이지 억울한 게 나는 결코 많은 연봉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결단코. 막상 그 자리에 앉으니, 동결, 그래 동결 정도로 합의하고, 2년만 존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너무나 곤란해 했다. 먼저 가격을 제시하면 참 좋으련만,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녀도 한낱 월급쟁이일 뿐. 이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은 나머지 한숨으로 가득 찬 좁은 골방에서 용감하게 말했다.
“저… 그러면 유지는… 되는거죠?”
어리석었다. 패를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지노선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유지. 그게 나의 자존심이고, 향후 내가 원하는 ‘종합광고대행사’에 가기 위해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고 치자.
“음…제가 잘 말해 볼게요… 저는 정말 지금이라도 당장 같이 일하고 싶거든요.
근데 아시겠지만, 여태까지 해왔던 그런 것들과는 달라서 많이 배워야 할 거예요.
그래도, 잘 말해 볼게요. 정말 같이 일하고 싶어요.”
정말 웃긴 아줌마다. 정말로 같이 일하고 싶다면, 웃돈을 줘야지. 그냥 너무 생짜 신입은 싫고, 적당히 딴 데서 구르다 온 적당한 연차의 나를 갈아 쓰고 싶다는 말을 피자 돌리 듯 돌리고 돌려서 한다. 정말 웃긴 아줌마, 그게 다였다.
웃긴 아줌마가 친절하게 배웅해 주셨다. 잘 생각해 보라고, 재미있는 광고 많이 할 수 있다는 사탕 발림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건물을 나서는데 고민이 됐다. 내일 회사에 가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 해야 할 일 중에서 내일 하루 종일 해도 나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을 일들이 절반이었다. 그러자 정말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정말 멍청하게도!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친절하게도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마지막 선택은 나의 몫이라는 것도 일러주었다. 무려 1년도 더 된 일이라서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 조언이 기억이 난다.
돈이 무조건 다는 아니지만, 우리 같은 월급쟁이에게는 연봉이 자존심이고, 연봉이 실력이에요. 들어갈 때야 간절해서 깎고 들어갈 수 있겠지만, 야근하다 보면 문득 문득 깎여버린 자존심이 생각날 것이고, 무엇보다 연봉 올리는 거, 정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냐 하면, 사실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광고계에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인사팀에서 동결을 말하면 한번쯤은 생각해 보기로, 협상 정도 해보기로_ 그렇게 하기로, 눈 딱 감고 결정했다.
그리고 정확히 4일 뒤,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회사 계단을 무려 2개 층이나 내려가서 받았다.
“여보세요.”
“저희가…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들리지 않았다.
“네? 잘 안 들려서요. 조금만 크게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녀도, 자기 자신이 싫어서 그렇게 속삭였겠지. 속삭이는 그녀가 말한 금액은 정확히 지금 연봉보다 천, 천원 아니고, 천 만원. 천 만원 낮았다. 천년의 정내미가 떨어지는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아니, 여기가 어디 중국 야시장입니까? 요즘 남대문 상가를 가도 그렇게 안 깎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정중히 대답했다.
“(지금은 욕할 것 같으니까) 메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웃긴 아줌마. 그냥,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 웃긴 아줌마였다. 기껏해야 3년차의 연봉, 그 작고 귀여운 걸 천 만원이나 깎겠다고, 나를 그렇게 불러 냈던 것인가. 마음 같아선 이걸로 쓴 연차 수당이라도 청구해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그 당시 다니던 회사를 마지막으로 광고를 접었다.
지금의 회사와 인연이 좋게 닿아서 반강제로 광고를 접긴 했지만, 더 이상 큰 종합광고대항사를 가겠다는 꿈 따위는 지웠다. 여우의 신 포도 같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모든 정이 다 떨어졌었다. 1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의 회사를 온 것보다 다행인 건 그 때 그 회사를 가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거기서 ‘천 만원’이나 낮게 불러줘서 깔끔하게 아주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는 것에 고오오맙다. 그리고 그 순간 든 생각은, 월급쟁이는 정말 연봉이, 정말로 다 구나.
보람도 포폴도, 결국 그에 합당한 연봉이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몸값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P.S
아줌마, 덕분에 잘 배웠습니다. 근데 그 때 그 자리, 또 공고가 났더군요.
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