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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래 Jul 02. 2023

포도밭 그 직장인

포도알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때는 나른한 오후 1시 37분, 점심을 먹고 양치까지 모두 마쳤다. 평소 같았으면 남은 업무 시간을 계산하고 머리가 아득해질 시간이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다. 사실은 점심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메뉴를 골라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배를 채우고, 재빠르게 아이스 커피도 사서 안착했다. 그리고선 곰곰이 생각한다. 앞으로 정확히 23분 뒤, 언제, 어디서,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


1차 확인은 사실 어제 다 완료하고 약간의 절망을 했다. 회사에서는, 티켓팅 사이트가 접속되지 않는다. 막아 두었다. 뭐 접속된다고 한들 사무실 한가운데에 앉아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고서 포도알을 수확할 만 한 그런 강심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니 사무실은 애초에 완전히 아웃이다. 티켓팅을 즐겨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티켓팅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최애 배우의 연극이 열리기 때문. 사실 입덕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또 그렇기에 화르르 타는 전투력이 있다. 그러나 전투력에 비해 손은 너무나 느리고, 환경은 너무 열악하다. 당장 PC방으로 달려가서 포도알을 주워 모을 태세를 취해도 모자랄 판에 사무실이라니, 사무실 안이라니! 생각해보면 PC방에 간다고 해서 완연한 승산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대학 시절 수많은 수강 신청을 말아 먹어 수강 취소 기간 때까지 포탈 사이트의 혼령처럼 돌아다닌 나였다. 


아무튼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어쨌든 포도알을 사수해야 한다. 일단 딱 한 알, 한 자리이면 충분하다. 최신형 컴퓨터로 해도 모자랄 판인데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게 영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서 고마운 용병을 몇 명 구했다. 집에서 방학을 만끽하고 있는 동생과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을 갖춘 전 회사의 친한 동료. 그러니 이제 나만 전쟁터를 구하면 된다. 오후 1시 45분,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는 메시지가 오고, 나도 적당한 자리를 찾기로 한다. 사무실 안 내 자리는 너무 위험하다. 비록 작디작은 폰으로 한다고 해도, 누군가 2시 정각에 나를 부른다면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할 것이다. 아니면 소리를 지를 수도 있겠지. 자고로 티켓팅이란 10분 안에 승산이 나는 법이다. 적어도 1시간은 새로고침하며 포도알을 구걸해야 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을 고려했을 때, 각 잡고 티켓팅을 하는 시간은 10분 안이면 충분할 듯하다.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가 향한 곳은 결국 화장실. 1층 로비에 잠깐 갈까도 생각했지만, 로비도 그다지 좋은 공간은 아니다. 역시 집중하기에는 화장실이 최고지. 1시 50분, 이제는 정말 각 잡고 자리를 잡아야 하거늘 화장실 칸이 모두 차 있다. 이렇게 세면대에 서서는 자리를 잡을 수 없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다행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칸이 비었다. 적당한 칸에 비장하게 들어간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이니, 화장실 빌런은 되지 않을 수 있다. 


티켓팅 경험이 짧지만, 이번 티켓팅은 난도가 낮으면서 높다. 우선, 다행인 건 아이돌 콘서트는 아니기에 티켓팅의 초고수가 밀려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 낮은 난도의 이유이다. 그러나, 연극 특성상, 내가 덕질하는 배우가 모든 공연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 날짜, 특정 시간의 티켓을 잡아야 한다. 잠깐 착각하면 애먼 타이밍을 잡기 십상이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날짜와 시간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 둔다. 1시 58분, 왠지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심장이 쿵쾅대서 핸드폰이 달달 떨린다. 이러다 누가 전화라도 오면 어떡하지? 갑자기 핸드폰이 꺼지면?, 옆 칸에서 갑자기 말을 시키면? 좁디좁은 화장실 안에서 백팔번뇌가 지나간다.


2:00. 핸드폰 상단 시계가 바뀐다. <예매하기> 버튼을 있는 힘껏 누른다. 최대한 빨리. 포스트잇에 있는 날짜, 시간을 제대로 누르고 대기한다. 대기 인원 612명, 강한 성공의 기운이 나를 감싼다. 대기가 끝나고 포도알이 펼쳐진다. 포도알이다! 포도알이 보이다니! 심장이 벌름벌름 뛰어서 기도가 컥컥 막힐 지경이다. 이왕이면, 앞줄이 좋겠다. 왠지 코앞에서 최애의 모공까지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럼 올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다. 용기 있게 두 번째 줄의 오른쪽 가의 포도알을 누른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최애 배우의 역할은 주로 오른쪽에서 연기를 펼친다고 한다. 그러니 오른쪽, 오른쪽 앞이면 최고의 선택인 것이다. 


포도알 결제창을 기다리는데 익숙한 문구가 뜬다. ‘이미 선택된 자리입니다.’ 이선좌, 이선좌다. 처음 누른 자리가 이선좌라니. 벌렁벌렁 날뛰던 심장이 녹아 없어진다. 심장이 녹으면 발끝까지 가려나. 아니면 끝까지 녹아 화장실 타일 안으로 스며들려나. 그럼 회사 공지에 이렇게 쓰여지려나. ‘OO층 여자 화장실에서 OOO 사원, 포도알 채집 실패로 영원히 잠들다.’ 절망에 식은땀까지 난다. 좀 더 뒤에 자리를 눌러보지만 이선좌, 다른 날짜를 눌러보지만 이선좌. 백 번 양보해서 연차 쓰고 가야하는 날짜 자리를 누르지만 이선좌다.  나의 액정이 이선좌로 가득 차오른다. 치사량이다. 온몸에 힘이 풀린다. 변기에 걸터앉아 수많은 이선좌를 목격하였다. 살아 뭐하나. 부질없다. 2시 13분, 10분 컷이 가능할 것 같던 나의 생각은 ‘이선좌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을 경우이다. 사실 이선좌의 시나리오는 그려본 적도 없다. 나는 생각보다 긍정적인 타입으로 성장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과거의 실패에서 배움을 얻지 못하는 타입. 아무 수확 없이 화장실을 나선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은 ‘이선좌’로 바글바글하다. 나의 용병들도 모두 실패하였다. 생각보다 거친 전투였다. 아이돌 콘서트가 아니니 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일단 연극은 콘서트보다 자리가 적다는 것을 간과했고, 나의 최애 배우가 바로 최근 작품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했다. 사실 나도 이 작품으로 입덕했는데 말이다. 유난히 대중의 눈을 가진 나였다. 시무룩한 몰골로 컴퓨터 메모장이나 두드리고, 레퍼런스 사이트에서 이것저것 클릭해 본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내가 화장실을 13분이나 다녀왔다고 관심 두는 사람도 하나 없으며, 그렇다고 내가 아무나 붙잡고 ‘제가 방금 최애 배우의 티켓팅을 화장실에서 실패했어요.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이선좌를 만났어요. 그래서 너무 우울하고 복장이 터집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미쳤소’라고 떠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신 나의 용병들이 한마디씩 위로를 해준다. 예대(예매 대기)를 넣어 두면 괜찮을 거라고 토닥토닥해준다. 그래, 백 번의 열악한 오후 피켓팅보다 한 번의 짱짱한 오전 예대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병든 닭처럼 자료를 보고 있는 오후 4시였다. 나라를 100번은 더 잃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동생에게 메시지가 왔다. 방금 자리를 하나 잡았으니 보여주겠다고. 다시 심장에 피가 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잡고 사진을 확인해본다. 맨 뒤. 정말로 맨 뒷자리다. 공연을 보다가 바로 나가도 모를 정도의 맨 뒤. 그래도 대학로 극장이니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리면 누가 누군지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최애 배우의 모공까지 보는 건 애초에 안 되고, 그래도 공연이라도 볼 수 있으면 다행인 거 아니냐는 동생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 일단 맡고 보자. 그렇게 맨 뒷자리를 사수했다. 안분지족. 그래도 볼 수는 있는 거 아닌가! 다행이다. 몰래 앱을 켜고 예매 페이지에 들어가니 포도알은 당연히 없다. 황폐하다. 만약 아무 자리도 갖지 못했다면 거의 울면서 퇴근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예매 페이지에 들어가 취소표나 망부석처럼 기다리겠지. 다시금 안분지족의 마음을 되새기고 차분해진다. 퇴근 5분 전 헐레벌떡 찾아오는 무례한 요청도 여유롭게 처리해 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포도알 꼬다리여도 성덕이 좋구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티켓팅의 여신을 성은을 입어 좋은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는 훈훈한 뒷이야기. 

심지어 두 번 보았습니다. 모공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이목구비, 표정은 하나하나 보이는 그런 관람이었습니다.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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