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경화 Nov 02. 2021

'잘 못함'이 위너다.

[ 부재_잘하는 것들에 대하여 ]

강연 끝나고 잠시 저녁식사,

강사들 대부분 끝나고 나면 혼신을 다 한지라


100이면 90은 끝나면 뻗고 싶고, 쉬고 싶고 집에 가고 싶다.


주최측의 성의와 마음을 알기에 기꺼이 갈때도 있고 마지못해 갈때도 있다.


하지만 청춘콘서트,북토크,자기개발포럼 류는 다르다.

내가 자처하는 편이다.


"2차 없나요?"



그들의 자발적인 열정과 뜨거운 눈망울을 더 담아가고 싶어서다.

아쉽기 때문이다.


주최 측이 딱히 없는 주최측인 본인, 스스로인 그들이기에 그런 자리는 늘 에너지의 시너지를 더한다.



오늘,이런 질문을 받았다.

유독 나같은 하고잡이 같은 성향을 보이는 하고잡이 꿈나무 직장인이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며 질문을 던진다.


"강사님.어떻게 하면 잘할수 있나요?전 잘하고 싶거든요.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말 #하고잡이 다운 밑도끝도 없는 질문이다.

'무엇'을 잘하고 싶은지 구체적인 실체도 없는 '어떻게'가 먼저이면서 중요한 '무조건' 잘할수 있는법...


우리는 아주 어릴때부터 엄마,아빠에게 

"잘해!!"

"잘하는지 지켜볼거야!"

"잘해야 해!"

"잘할수 있지?"

"잘할거야?못할거야?"

'잘함'에 대한


무의식의 압박과 무언의 결핍을 느끼며 자라왔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역량과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타를 받으며 세뇌를 당한다.


"넌 왜 이렇게 못해?00는 잘하는데!!

진짜 제대로 안할래? 좀 잘하지 못하겠니?"


누구나 잘하는 영역과 잘하지 못하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잘함'을 강요하는 어른들도 선생도 부모도 모든것을 잘하지는 않았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만능일수가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모든것을 잘하기를 요구하고 바라는 '잘함'에 대한 강압적 희망들은 사기를 

저하시키고 기를 짓눌려버린다.


잘하려고 할때 잘된적이 많았는가?


생각해보자.


오히려 내적분란과 집중력 망각으로 잘되지 못할 때가 많다.

잘하려고 할수록 우리는 무엇을 이토록 잘해야하는지 그 주체를 잃고 오직 잘해야한다는 것에 

올인해왔다.



독일의 유대계 이론물리학자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당대의 물리학계를 파격적으로 뒤흔든 인물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1955)은 '강압'적인 교칙과 교사를 

증오해 학교를 매우 싫어했다.


아인슈타인이 학교란 곳에 치를 떨며 회상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선생들은 장교 같았다. 학교는 내 즐거움과 거룩한 호기심을 질식시켰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 먹이를 먹으라고 채찍질로 강요당한다면 건강한 맹수조차 식욕을 잃을 것이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먹이를 던져준다 해도 전혀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가기 싫어해 편법을 쓰면서 까지 학교를 이탈하려고 했던 과정이  

지금의 아인슈타인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남들 다하는 학교 과정을 똑같은 수순으로 밟으며 그저 '잘함'의 기준을 함께 두고 유년기를 보냈다면 오늘날의 '상대성이론'도 있었을까?생각해본다.



필자인 나는 아인슈타인과 다르게 완전히 수학과목에는 젬병이다.

줄곧 꼴찌를 하더니 줄기차게 꼴찌를 하고 고3 수능까지 한결같이 하락점수를 맡았다.


대신 나는 언어영역에 뛰어났으며 암기하는것,창의력 사고영역,특히 예체능에는 두각을 미리 나타냈다.


음악,체육,무용,미술 두루두루 잘했다.

전공을 여러번 바꿀 정도였고, 실제로 전공을 여러번 바꿨다.

체육고를 다녔고,대학은 무용과를 전공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다.


대학원은 노인여가학으로 논문을 쓰고 마쳤다.

나는 정말 아주 어린 나이부터 반전의 반전의 스토리로 이루 말할수 없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만약 나같은 사람에게 죽어라 공부만 잘하라고 '강요' 받았다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절대 없다.

상상할수조차도 없다.






다른 방향성으로 본다면

나의 전공분야에서의 '잘함'을 강요받는것도 마땅한것이다.

특히 예체능전공자들은 알겠지만 어중간하게 잘하면 이도저도 

안되기때문에 자신의 한계와 고독을 씹어먹는 싸움을 수억번하는 트레이닝을 생활화한다.


잘하라고 강요받지 않아도 잘할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도 멘탈의 차이며 개인의 성향에 차이다.

나같은 하고잡이같은 경우는 체육고를 다닐때도, 대학을 다닐때도, 중학교 꿈나무 선수시절때도, 

무용단시절때도, 방송아카데미 시절때도,대학연극제 출품할 시절때도,쇼호스트패널시절때도,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지금의 열정을 그대로 보존했던 사람이다.


그때의 동료와 후배,선배,스승들이 증인이다.

나같은 하고잡이들은 태생부터 본능이 잘하려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위를 보면 입만 노력할뿐

실제로 빈둥빈둥 노력하지 않는이들이 더  많다.그럼에도 현실을 타박하며 불만을 제일 많이 야기한다.




이쯤해서오늘의 하고잡이의 질문을 다시 되새겨보자.


"강사님.어떻게 하면 잘할수 있나요?전 잘하고 싶거든요.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 2021년의 송대표는 이렇게 대답한다.


잘하려고 하지말자.그냥 하는거다.

잘해서 하는거 아니다.그냥 하는거다.

이유를 붙이는게 아니다.그냥 하는거다.

사족을 붙이는게아니다.그냥 하는거다.


구체성 없이 잘하고 싶을때는 답도 마찬가지다.

구체성이 없이 질문도 답해준다.



그냥 잘하려 하지말고, 그냥 하자.


뭘 잘하려고 하냐?

하다보면 잘되는거고,

하다보면 잘 안될때도 있는거다.

그러다 어쩌다 하다보면 잘되고, 

잘되다보면




그때 잘해보자! 제대로 잘해보는거다.


가속도는 그때 붙이는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너지는 삶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