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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경화 Nov 23. 2021

무엇이 그리 슬픈가?

그와 함께 기도하는 삶, 아멘....

사회초년생은 모든 게 낯설다.

더군다나 나같이 무식하게 열정 빈도가 높은 이에겐 

더더욱 그렇다.




의리와 무식을 무장한 20대의 송경화의 꿈은 학교에 정착하는 게 꿈이었다.

뒤늦게 학문의 불똥이 튄 나는 대학 4학년이 돼서야 장학금을 받고

탄력 받아 대학원을 진학, 무섭게 전공과목에 대해  학문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꿈과 목표는 '교수'였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비싼 등록금에 비해 재미없게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어린 패기로부터였다.


두 번째, 평생 공부보다 몸을 이용해 살아온 삶인데 두뇌를 쓰는 재미를 뒤늦게 알았다. 공부도 나의 적성이라는 것을 22살부터 알게 된 것이다.



교수의 꿈을 꾸며 석 박사 과정을 계획해 무난하게 달리는 과정에 학부 조교, 대학원 조교, 대학원 연구원 등 정식 코스를 밟는 중 우리 학부의 교수님 한 분이 총장대행으로 잠시 올라가면서 조교였던 내가 원치도 않았던 교직원 / 총장 부속실 전임 비서로 직행하게 되었다.

잔인하고 고독한 첫 직장,총장님이 안계셨더라면 지금의 내 기억의 조각은?                                                 


총장대행을 하신 교수님에게는 나만큼 적격 한 비서가 없으셨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거수일투족을 잘 아니 

그러하겠지만....

좋은 기회를 주셨던 건 분명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나를 비서로 믿고 지정해주신, 첫 번째 모신 총장대행 & 교수님의 대한 좋은 기억이 안타깝게도 많이 없다.





비서로 일하는 첫날부터 나는 지옥행 열차를 입성했다.

학생이었을 때 캠퍼스를 종횡무진, 당시 학교뿐만 아니라 대전시의

공중파 방송에서도 활약한 방송인이기도 했던

연예인은 아니지만 일반인도 아닌 좀처럼 설치고 다녔던

인물이 바로 나였다.


4년 내내 학과와 총학생회에서 임원활동도 해왔었는데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복합적인 캐릭터를 가진 내가 비서생활하는 내내 고통을 받게 된다.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이 집결하라 하면 총장실로 출동해  

'등록금 동결' '등록금 타결' '비리 있는 학교 타파'를 외치며 

총장실 앞에서 데모 아닌 데모를 했다.


왜 하는지 개념을 모를 때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가스 라이팅으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큰일 날 일이 생기는 줄 알고 더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게 해오던 것들이라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선배들 말이라면 죽으라는 시늉까지 해야 했던 학부의 분위기와

일단 무턱대고 덤비고 보는 나의 성향도 왜 없었겠느냐... 무조건 남 탓을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학생으로 조교로 비서로 있던 우리 학교는 크리스천의 정통 학교이자 100년의 역사가 넘는 

사립학교이며 교수와 교직원 대부분인 목회자들이다.




그렇게 비서로 임명받는 첫날부터 눈에 가시였던 나는 교직원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랬던 애가 "여기 왜 왔냐?" 이런 수군거림이었고

학생 신분인 후배들에게는 천하의 x 년으로 욕설이 들려왔다.

비겁하다, 그럴 줄 몰랐다, 혹은 그럴 줄 알았다. 두 얼굴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앓았던 병은 '대인 기핍증'이었다. 매우 심각했는데 누가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화장실로 가서

 10분을 펑펑 울었다.

기력이 넘치다 못한 애가 온 세상이 나를 욕하는구나, 나는 무엇을 잘 못했을까로 하루 종일 고민하며 

기가 죽어 살던 삶만 살았다.


'가면성 우울증'은 최고치여서 아무도 내가 그런 그늘과 상처가 있는지 몰랐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누구보다 당당하게 웃으며 밝고 씩씩했게 근무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내가 1학년 입학한 그날부터 시끄러웠다.

부끄럽지만 매일같이 다투는 교수들의 세력다툼과 목회자들이 맞는지, 교육인들이 맞는지 부끄러울 정도로 실제 비리가 많았다.

(내가 크리스천을 하지 않는 이유/교수의 꿈을 놓은 이유도 비서일을 하면서다.)


비서가 되고 보니 더욱 많은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되지만

"송 비서 말하지 마", "송 비서 못 본 척 해" , "송 비서 무슨 말인지 알지?" 이런 말들로 불의로부터 

나를 함구시켰다.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은 알 것이다. 나는 불의를 결코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학교와 교수의 날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속으로 앓는 일은 24살밖에 안된 내가 하기엔 매우 벅찬 일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 바빴던 내가 퇴근하면 집구석 알 콜러가 된 시점도 이 시기이다. 누구를 만나서 현재의 내 삶을 토로할 것인가? 혼자만 알아야 하는 내 직업, 고독하고 매일이 우울했다.

당시 맨날 술에 절어서 전화를 해 목놓아 울어서 걱정시켰던 나의 절친만이 내 고통을 알 뿐이다.(그 절친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이 ㅠ)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진 비서의 삶, 하지만 내가 경험한 비서는 다시는 할 직업이 못된다.



총장님을 모시게되고,처음 본 멋진 총장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세상과 소통을 단절할 시점에 이요한 총장님이 새롭게 신임 총장으로 선출되셨다.

목사라면, 기독교라면 속으로 욕만 해댔고 불신만 가득했다.

새로 오시는 총장님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생각했는데 총장님은 모든 것을 뒤엎는 분이었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목회 공부를 하신 교수 출신이자 선교연구소, 선교국 총무 등 총장님의 아버지 이경재 목사님(감독님)으로 까지 집안 자체가 목회자의 집안이시기도 한 오로지 주님의 삶으로 살아온 분이시다.

시끄럽던 학교 내외 분쟁을 이사회에서 몇 달 동안 신임 총장에 대한 검토를 한 최종 인물이 내가 두 번째로 모신 총장님이자 마지막으로 모신 총장님이시기도 하다.




총장님은 정말 매너 그 자체이며 사람 마음을 따스히 바라볼 줄 아신다.

총장실로 출근하신 지 일주일도 안된 어느 날이었다.

스케줄 전면 보고하러 총장실로 들어갔다 나오는데 나를 불러 앉히셨다.


송경화라 그랬나? 송 비서는 무엇이 그렇게 슬픈가?


첫마디의 물음이셨다.






나는 그날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오한이 떨릴 정도로 바르르 떨며 움켜쥔

나의 마지막 강한 자아의 끈을 놓고 말았다.


내 속을 훤히 보고 계시는구나. 너무 놀래 부임하신 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저 저명한 목사님이자 총장님 앞에서 총장실이 떠나갈 정도로 감정을 주체 못 해 울음으로 답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나에게 휴지가 아닌 슈트 한편 사이에서 꺼내신 손수건을 건네셨다.

그리고 통곡하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렇게 목놓아 울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날은 우리가 매번 만날 때마다 꺼내는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겪은 고통과 상처가 한순간에 아무는 순간이었다.

총장님은 늘 나의 눈을 바라봐주셨다. 하루 종일 눈 한번 안 마주치고 사무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다른 이들과는 너무 달랐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람으로서 사랑해주시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던 분이다.


총장님은 안밖으로 많은 선도활동과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언론에 내비치는것을 싫어하셨다.몇개없는 기사보도...



총장님을 모시는 동안에도 학교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총장님은."송 비서는 나가 있어도 돼. 아무 일도 아니야", "송 비서는 퇴근해. 좋을 게 없어"

전쟁통 같은 상황에 밤새도록 학교에 나를 붙들지 않으셨다.


정말이지 검소하고 묵묵하고 남자답지만 누구보다 자상하셨던 분,

총장님이 계신 교회라면 한번 다녀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마음까지 생겼다.


총장님의 환송예배를 못가본게 두고두고 한이 된다.대기업의 출장스케줄을 내가 컨트롤할수있는 짠밥?이 되지 못했던 시기였다....


많이 챙겨주시고 아껴주셨지만 나의 비서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더했다간 정말 정신병원에 입원할지도 모를 정도로 심신이 약해져 있었고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내가 퇴사하는 날, 총장님은 나를 앉히고 1시간을 기도하셨다.

사무실 짐을 싸는 동안 나는 차에서 실신했는데 그 사이  우리 어머니를 불러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말 착하고 열정적이고 순수한 애인데 많이 보살피지 못한 것 같아 되려 미안하다고까지 하셨더랬다.

난 그 말을 듣고 또 목놓아 울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작년 겨울 보내주신 총장님께서 직접 지녀온 십자가,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주석스님이 주신 염주도 아직 차고 있다.종교를 초월한 그들의 사랑의 나는 더 보답하는 삶을 살고싶다.




대통령을 꿈꾸다 실패해도 국무총리라도 한다는 말처럼, 교수를 꿈꾸다 실패해도 강사라도 하는가 보다.

비서생활부터  시작한 비즈니스 매너 강의, CS 강사일부터  프리랜서 강사일을 알음알음 해오다 몇 년 뒤 

LG전자 경력 강사로 이직해 근무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사 사무실로 꽃바구니가 왔다.


'송경화를 응원한다!'

총장님이 보내셨다. 참으로 로맨틱하신 분, 사려 깊으신 분.

그렇게 또 나를 그날  눈물로 감동을 주셨다.



이제는 모든걸 쉬고 내려놓으시고 건강에만 유의하셔도 되지만 역시나 총장님은 소신대로의 삶을 살아가신다.


총장님은 내가 대기업 강사 시절 정신없이 일할 때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셨다.

어느 날 총장님과 연락이 닿았을 때는 서울분이신 총장님이 강원도 원주 산골에 있으니 놀러오라셨다,

총장님은 현재 심장에 스텐 시술을 세 개나 넣고 관리하고 있으며, 당뇨 등 투병 중에 있다. 사실 이러한 몸 상태로는 오로지 건강을 위해 쉼이 필요한데... 현재까지도 목회로 활동 중이시다.


목회자로, 교수로, 대한민국 기독교 활동을 전면에 세워서 열심히 해오셨지만 숨어있는 곳의 진정한 목회를 해오지 못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신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보도 링크를 꼭 참조해보시길 부탁드린다.

http://m.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48





아직도 가지 못한 쉼이있는 교회,총장님의 개척교회,현재는 새벽기도회로부터 주일예배 인도까지 목회에 헌신하시는 중....




주변에 크리스천들이 정말 많다.

나를 늘 전도하려는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하지만 나 같은 청개구리 심보는 좋다고 해보라고 하면 한걸음 뒤로 더 도망가고 의심한다.

기독교의 전도문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은 본인이 결핍하고 낭떠러지 앞에 있으면 끄나풀이라도 잡게 되어있다.

죽음 앞에 있어도 나는 종교따위는 찾지 않았다. 무엇이든 사람 나름이니까...


총장님이 늘 내 마음에 있기에 그나마 내가 아직도 기독교에 대한 마음이 한편에 감사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재작년 내 안의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6개월 동안 절을 다니며 하루도 빼먹지 않고 108배를 했던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은 종교가 없다고 봐야 한다.

내 마음 안에는 모두가 감사함이고 생명이다.





다만 이요한 총장님이 주신 사랑과 목회를 걷는 순수한 길을 보며

우리 삶,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삶, 앞으로 살아갈 청년들에게 어떤 미래를 선보일지 어떤 길을 안내할지 진정한 '전도', 인생의 '전도'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15년도 더 된 창가에 햇볕이 조심스레 앉아있던 그날,

"송 비서는 무엇이 그렇게 슬픈가?" 하며 나를 진정으로 치유하신  그날을 잊지 않는다.

그 은혜를 잊지 않기에 나는 오늘도 총장님과 총장님 사모님의 두 분의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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