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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Oct 13. 2019

여행에서 찾은 것

다낭 가이드북 개정판이 이제 인쇄에 들어갔다. 표지나 프로필은 알아서 해 달라고 했다. 나중에 생각나 확인해 보니 내 프로필이 정말 마음에 안든다. 벌써 나이가 40인데 대학입시가 어쩌고라니 근2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대학입시에 관해 생각하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다. 그래도 나의 여행의 시작은 그것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쩔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대학입시를 성공하면 인생이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학도 하기 전 신입생 환영회 랍시고 선배들에게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1년 선배들인데) 둘러싸여 쏟아지는 술을 거절도 못하고 연거푸 마시고는 꾸역꾸역 언니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다가 청량리역 남자화장실 세면대에 위를 게워내면서 알았다. 내가 고작 이것을 위해- 말도 안되는 신입생 술문화를 위해, 예쁘지 않고 뚱뚱한 촌스러운 학생들을 싸잡아 괄시하는 분위기를 위해 - 달려왔던가.


쫄보중의 쫄보인 나는 그렇게 대학내내 무언가에 억눌리고 힘겹게 적응해내며 보냈다. 쿨한척은 하고 싶어서 아무에게도 적응하기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몇번 하긴 했는데 듣는 사람은 죄다, 내가 '배부른 소리나 한다' 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취직걱정은 전혀 할 일이 없었으며, 맨날 술마시는 생활에 비하면 성적도 나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도 간간히 다른 진로를 모색하긴 했지만 그때그때의 삶의 괴로움을 건너느라 시간을 우야무야 소비했다. 그 와중에 우여곡절 끝에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가 냉큼 때려치고 도망나간것이 바로 내 여행의 시작이다. 그러니 내 여행의 테마는 '이곳에서의 도피' 정도가 될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여행지에서, 특히 일정 없이 혼자 떠돌아다니고, 한 숙소에서 기약없이 묵곤 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의 도피'로 여행을 선택한다. 그것을 입밖에 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서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곳에서 도저히 채울수 없는, 혹은 이곳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찾아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는 순간, 그것은 거기에 없을 것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무언가를 찾아 헤멨다. 배낭여행을 할때는 배낭에 뭔가 하나 없어져도 전혀 아쉽지 않은 것들로 채워넣는다. 그리고는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는 트럭 뒷 좌석에 오른다. 시장 한구석에서 새벽에 출발하는 트럭은 일정따위 없이 사람이 다 차면 그대로 출발한다.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산을 넘어서, 오밤중에 손전등을 비추며 볼일을 보며 그렇게 어렵사리 다음 장소에 도착한다. 제대로 된 방은 없지만 대충 침대가 있는대로 잔다. 이것은 부랑자를 가장한 배낭여행이다. 서울역의 부랑자들이 남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 그래서 무엇을 찾았어? '


찾았나? 오랫동안 헤메고 이곳 저곳을 다니고, 삶의 방향을 계속 수정하면서. 그동안 한 일들을 손꼽자면 수도 없다. 고시도 해보고, 프로그래밍도 배우고 여행가이드북도 썼다. 물론 전공일도 했다.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여행사 일도 하고.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무엇을 찾았나?


무엇을 찾았나?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에서는 그 무엇을 찾지 못했다. 몇개의 나라를 돌아다녔는지, 얼마나 오지를 돌아다녔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은 없다. 다만 눈치빠르게 살아남는 법, 남들 눈을 덜 신경쓰는법, 그리고 좀더 뻔뻔해 지는것, 다신 안 볼 사람들과 인생을 논하는 법 같은것을 하나씩 배웠을 뿐이다. 나 자신도 그 과정에서 조금씩 변했다.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여자애에서, 지금은 그냥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여자로. 나는 주변에 영향을 받아 마냥 영문을 모르고 괴로워하는 내가 아닌 힘들어도 내가 나대로인 '나자신'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여행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일테다. 다만 여행은 사회라는 '집단'에 물들지 않는다. 온전히 내가 계획하고 상황에 대처하게 된다. 완전히 혼자, 혹은 내가 선택한 누군가와 함께.


여행에서 난 늘 뭔가 대단한 '무엇인가'를 찾아다녔지만, 남은것은 지금 여기 아무것도 없고 남은것도 없어보이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일단 '지금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지금의 나 자신이 여행을 시작할때의 나 자신보다는 훨씬 마음에 든다. 사실은 이게 아무것도 사회적으로 이루지 못하고 이제서야 진정한 '출발선'을 찾아서 서게 된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 인것 같기도 하다. 그럼 뭐 어떠랴. 어차피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지금 이 순간의 감동으로 채워지는 여정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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