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미 May 15. 2020

좀 망한것 같다.

아, 진짜 망했다. 응암동의 오피스텔 안에 누워서 적어도 한시간은 그 생각만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나이 마흔이 되는 해에 이렇게 열평 남짓되는 오피스텔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하얀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리란 것을 예상이나 했던가? 기분 전환을 위해 채광이 잘 드는 곳으로 일부러 이사를 했건만, 커다란 창문 밖을 일부러 쳐다보는 일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들 분주히 무엇인가 하고 있을 낮 시간, 불광천변에는 하얀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더 없이 화창한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커텐을 닫았다. 


이혼을 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 집을 구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집을 구할때나,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자취방을 여러번 구해 보았지만 이혼을 하고 새 집을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막막했다. 예산을 제외한다면 집을 구할 아무런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어딘가 직장을 다닐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피할곳을 결정하기로 했다. 지도를 보면서 한번도 살지 않았던 동네를 찍었다. 기존의 가전을 모두 버리기로 했으므로, 그 동네에 딱 둘 있는 풀옵션 오피스텔 중에 방이 마침 나온 한 곳으로 계약했다. 원룸포장이사를 하고 그대로 침대에 나를 뉘였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화석이 되었다...... 는 거짓말이고, 처음에는 애썼던 것 같다.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애쓰고, 친구도 만나고, 책도 쓰고, 남자도 만나고, 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종국에는 마침내 이렇게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우울감 한번도 겪은 적이 없어, 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살면서 우울감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울할 일은 어릴적에도 꽤 많았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때문에 우울했고, 엄마의 우울증과 자살시도 덕분에 우울했다. 짝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아서 우울했고, 써클 선배들이 예뻐해 주지 않아서 우울했고, 대학에 적응하기 힘들어 우울했다. 그래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우울의 웅덩이 같은데 온몸이 푹 빠져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간혹 숙취와 우울감이 합쳐져 힘들때면 집에 내려가 엄마를 보면 되었다. 이제는 엄마도 없어졌고, 인생의 절친이라 믿었던 남자친구는 전남편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발버둥 치는 일은 벌써 10년도 넘게 여전히 방향을 잃고 표류중이다. 나이마저 마흔이다. 이 모든 것이 서른 정도에만 일어났어도 좋았을텐데. 아니,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망한건 확실하다. 차라리 이대로 온 세상이 확 끝나면 좋겠다. 외계인이 침공하든지 아니면 북한에서 폭탄이라도 안 쏘나. 세계가 멸망한다고 몇십년동안이나 믿으며 준비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니, 내가 뭘 이해하겠나, 내 인생도 이해 못하겠는데. 뭐, 간절하면 이루어지리라. 근데 뭔가 간절할 에너지나 정신력 같은것도 사실은 없다. 그냥 좀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 남들도 다 망하면 기분이 좀 덜 나쁘지 않을까. 최소한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은 없어지지 않을까? 


교감신경 항진증과 부교감신경 항진증 중에서 더 포악한 것은 교감신경 항진증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낫다. 그러니까 지금 확실히 교감신경항진증이다.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호흡이 곤란해져서 급기야는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 죽는 것은 괜찮은데 죽을때까지 계속 이렇게 호흡이 곤란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생각의 회오리 속에 갇혀있는 채로 견뎌낼 수는 없다.


사는건 둘째치고 숨을 쉬는게 너무 힘들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장 가까운 정신병원을 검색하고, 전화를 해서 언제 가면 되는지 물어보고, 집을 나섰다. 의사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고, 약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약의 효과인지 아니면 약을 먹었다는 안도감인지, 그냥 잠깐 운동을 했기 때문에 생긴 도파민 덕분인지 마음이 편해졌다. 


망한거 같긴 한데, 일단 아무리 기다려도 세상은 망하지 않을것 같아서, 더 이상 고통을 참아낼 수는 없었으므로 그냥 다시 뭔가를 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망했으니 뭘 해도. 어차피 나에게 뭐라고 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