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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May 16. 2020

2. 이혼의 세계

친한 동생이 최근 핫이슈인 드라마 '부부의 세계' 이야기를 꺼냈다. 본 적은 없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개란다. 어떻게 그렇게 서로 죽일듯이 싸워놓고, 다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낸 것 만으로 두 사람이 다시 친밀해 진다는데, 그놈의 작가가 누군지 몰라도 그런건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 그런 사람 많아...."


그렇다고 여기서 나의 전남편과의 관계를 구구절절히 얘기...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그냥 그만 두련다. 다만, 미움과 사랑은 한 통속이라는 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이혼은 너무나도 사랑해서 평생 한 집에서 살겠다고 결심한 상대방이 이제는 차라리 어디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싶게 되어버려서, 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게 두 사람을 떼어놓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미움이 깊다는 것은 상대에게 여전히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사랑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정말로 있기는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한때는 어쨌든 실재한다고 믿었던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겠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분명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던 그 남자였을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괴로워진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눈앞의 이 사람이 과거의 내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혼란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사랑한건가' 하는 절망으로, '알고보면 내가 한 것은 과연 사랑인가' 하는 의문으로, '사랑이란것은 다 허상인가' 하는 허무함으로 변한다.


아무튼 이혼이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고 해서, 그만큼 서로 죽일듯이 미워진다고 해서 내가 예전에 절절히 사랑했던 그 사람 찾기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것 같은게, 가정법원에서 만난 모든 커플들이 다 그래 보였다. 서로 얼마나 죽이고 살리는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절대 그렇게 원수지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참고로 가정법원에서 이혼을 하는 일은 일종의 블랙코메디 같아서 비극적이라기 보다는 좀 웃기는 일에 가깝다.


대충 말 해 보자면 이렇다. 이혼을 하기로 하고 전 남편과 가정법원 앞에서 만났다. 함께 서류 접수하는 곳을 찾아가서 이혼신청서를 받았다. 전 남편이 내게 볼펜을 빌려주고, 예전 주소를 잊었다고 해서 내가 대신 써 주고, 필요한 서류를 출력하러 자동민원기가 있는 1층으로 함께 내려갔다. 내가 잔돈이 없다고 하니 전 남편이 요금을 냈다. 다시 올라가 서류접수를 하면서 둘러보니, 마치 다정한 부부인양 두 사람이 머리를 맡대고 열심히 내용에 대해 상의하며 이혼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이 사전 선거일이었는데, 우리는 일을 끝내고 내려와 함께 사전선거를 했다. 정치성향은 같았기 때문에 함께 상대편 쪽을 실컷 욕해주고는 마치 동지가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아져서 담배를 폈다. 그리고는 근처에 맛집이 있는데 함께 밥이나 먹을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한 달 뒤에 법원에서 다시 만났을때도 순서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대부분은 마치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 같이 평범해 보였다. 다들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서 아무도 이혼을 하지 않을것 같아보였다.


그러니까,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던 존재와 어느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헤어지게 된 것이다. 분명 나의 모든 것을 아끼고 나눈 소중한 존재였다. 이성은 예전에 사랑하던 그는 이제 없다고 말하지만 마음 어느 한쪽에서는 계속 어딘가에 있어 마땅한 그 사람을 찾는다. 그는 분명 저런 얼굴과 저런 말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눈 앞의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계속 착각하고 방황하고 나의 사랑하던 그 사람은 대체 어디갔느냐며 우울해 한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머릿속에 그 생각이 하얌없이 맴돌았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다시 그를 만나고, 다시 실망하기를 몇번이나 반복했을 즈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이제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남남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했던 습관은 아직 남아서 내 옆자리의 이 빈공간을 자꾸 어색해 했다. 뭔가 불완전한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커플' 이라는 것을 내 완전한 형태로, 내 평범으로 인식해버린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 전 남편에게서 예전의 그 남자가 혹시나 조금이라도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하고도 헛된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바보일 수 있는지 예전엔 나도 몰랐다.


어느날, 그런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홧김에 누군가를 만나보기로 했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만나보자고,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냥 만나보자고 다짐했다. 과거의 사랑이라는 허상을 내 인생에서 지우려면 그게 제일 빠른 길이겠다 싶었다. 안 그랬다간 도대체 이놈의 굴레를, 이혼을 하고 서류를 다 정리하고도 나 혼자 얽매여 있는 이놈의 굴레를 끊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을것만 같았다.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소리라는 것은 나도 이제는 알지만. 그땐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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