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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May 20. 2020

불행은 주관적이다.

정말로 이렇게 까지 힘든 일을 겪고도 다들 멀쩡하게 살아간다고? 하고 생각한 것은 엄마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이혼을 하고 일년남짓 다시 정상인이 되려고 발버둥을 치던 와중이었다. 그때 무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당시에 맹렬하고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한 부분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뇌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다. 당시에 친구들이 도대체 집 안에서 뭘 하느냐고 물었을때, 나는 너무 바쁘다고 말했다. 아주 사소한 일을 하려고 해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시간은 늘 모자랐다.


그래서였다. 내가 그 해 어버이 날에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은것은 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 두자. 그러나 그 전에도 약 1년간은 엄마에게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그 해 설날에 엄마를 본 것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어떤식으로 생각하든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죄책감을 덜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그해 어버이날이 지나고 바로 그 주말에 엄마를 만나기로 했고, 엄마는 내가 내려간다고 말한 날 바로 그 전날에 자살했다. 엄마는 응급실에서 이틀을 의식도 없이 연명하다가 결국 다른 병원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돌아가셨다.


그날, 아빠가 전화로 엄마의 자살소식을 알렸던 그 순간만큼은 기억에서 생생하다. 아빠는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엄마가 병원에 있다고, 엄마가 목을 매었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집으로 가는 표를 알아봐야 하는지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옷을 입으려면 검은색 정장을 입어야 하는지, 무슨 신발을 신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집에서 서울역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를 계산하며 지하철역으로 걷다가 그제야 택시를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탔는데 택시는 그날따라 빙 둘러서 서울역으로 갔다. 택시안에서 울면서도, 택시 아저씨에게 항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병원에서 밤을 새며 엄마의 곁을 지킨 일이라든지, 누구에게 말 해야 할지 몰라서 뜬금없이 딱 한번 만났던 남자에게 문자를 보낸 일,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밥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 받은 일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 막상 엄마가 돌아가셨을때도, 나는 밤새 엄마의 곁을 지켰다가 집에 돌아와 눈을 붙이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더 이상 고생하지 않게 되어 잘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다. 내가 제일 엄마의 속을 썩이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파킨슨 병을 앓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죽음에 엄마의 지인들은 모두 엄마의 사인을 물었다. 아빠는 엄마의 사인을 사고로 둘러댔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집에 계셧고, 아마도 엄마의 죽음에 가장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우리는 아빠가 하는 대로 그렇게 엄마의 사인을 둘러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빠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지인분들은 다들 나를 보고는, 엄마가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마디씩 했다.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나를 붙들고 대화를 하다보면 조금씩 풀리는 듯 했다. 나는 그 분들이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아는척을 해야 했다.


엄마의 한 친구분이 기억난다. 누군지 아직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내게 이름을 이야기하고, 내가 자신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사람도 잊어버릴 정신이었지만, 그 분 곁에 앉아서 엄마와의 추억을 귀담아 들었다. 이야기는 그 분의 얼마나 불행한지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 분은 내가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마음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또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왔다 갔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들은 그 분의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한번 이름을 알려달라고 물었다. 그 분은 크게 상처입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 외에도 그날 들었던 말들. 나 같아도 어머니처럼 오랫동안 아프셨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나, 왜 절친인 자신에게 나의 이혼사실을 남들보다 늦게 알려주는지 섭섭했다는 말, 눈물을 멈출수 없어 힘들어하던 나를 붙들고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울면 안된다며 야단치던 말, 엄마가 얼마나 너를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런 말들이 혼돈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나인 줄 알았다. 지인이라는 사람들이, 내 친구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일 줄 몰랐다. 이혼한 뒤로는 만사에 다 배신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때도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는 전남편이 된 사람의 어머니가 위독해 겨우 항공기를 잡고 급히 귀국했을 때, 그 사람은 밤새 하얀 밤을 샜을때 나는 그 옆자리에서 만화영화를 보며 킥킥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해 연말에 술을 마시며, 올해는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나갔다고 말했을때의 그 사람의 표정이 생각났다. 그때 그 사람은 이런 심정이었을까? 그제서야 불행은 정말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 다른 개체고, 나 자신의 불행은 내가 감당하는 수 밖에 없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행은 주관적이다. 남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실감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던가? 그러니까 다들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 처럼 보여도 무수히 많은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아직 여전히 진행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벌써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 속 어딘가에 가라앉아있던 고통이 슬며시 다시 떠오른다. 주위의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모두 그런 고통의 침전물이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겠지. 이제서야 그게 눈에 보인다.......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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