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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 Jun 08. 2024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브런치를 한동안 들어오지 않다가, 우연히 검색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이혼하고 한참 바둥대던 때의 내가 이곳에 흔적을 남겼구나 싶었다. 마치 남 이야기를 읽듯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역시 남(?)의 불행은 재미있구만, 하며.


그때는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그 힘든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해본 것 같다. 오만데를 여행하고,  오만 소모임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며, 별별 사람들을 만났다. 심지어 영화 연출 워크샵에 들어가 영화도 찍었다. 나이가 한참 많고 체력도 안 되는 사람이 괜히 끼어들어 불편했을 동기들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웬만하면 쓸데없는 말하지 않고 결정단계에 괜히 끼어들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튼 그래서 그 이후로 어찌 되었나. 마흔에 이혼하고, 엄마가 자살하고... 작가일도 병원일도 다 때려치고 오피스텔 천정이나 바라보던 사람은? 왜 글을 쓴다고 해 놓고 감감 무소식이였나? 구독자가 150명이나 되는데?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분이 있다면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전하겠다. 근데 이 말을 하면 다들 금방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음. 그 이후로도 수많은 일들이 생겼지만, 단 하나의 사건이 모든 일들의 빛을 바래게 했다. 즉.


유방암에 걸렸다. (다행히 0기다. 다행히 아직은, 죽을 날이 눈앞에 보이지는 않을 정도라는 얘기다. 재발만 하지 않는다면. 근데 유방암은 재발이 많...)


거 참.


그리고 그 순간 나의 MBTI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확실히 INTP이다.


얼른 수술하자고. 그래도 다행히 0기니까 수술만 하고 약만 먹으면 괜찮다는 의사의 말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 큰 병원으로 갈지, 아니면 빠른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이곳에서 하는 게 나을지. 검사와 수술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먹어야 한다는 호르몬제의 부작용은 어떤지, 입원하면 집에 혼자 있을 고양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판단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신경쓰였던 것은 친구들과 가족들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솔직히 그들이 없었으면 했다. 그러면 신경써야 할 것이 줄어들테니까.


그래도 어쩔수 없지. 난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이혼하고서 가장 많은 원망을 들었던 것은 '내게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였고, 내 입장에는 그 소리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나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에 바빠 죽겠는데 왜 네게 일일이 이야기를 하고 네 심정을 배려해야 하는가 했기 때문이다. 그걸로 섭섭할 수는 있겠지만, 그때만큼은 자기보다 감정적으로 힘들것이 확실한 나를 더 배려해 주고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게 예의 아닌가?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나의 사회성을 십분(?) 발휘해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일단 이것이 생각보다는 별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내가 지금 신경쓰이는 일이 많아 너를 신경쓸 수 없으니, 되도록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예쁘게' 말했다. 이렇게 쓰고보니 되게 사이코패스 같지만, 예쁘게 말했음을 강조해 본다.


아무튼 그렇게 하고, 평소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 가족에게는 어차피 길어야 2박3일 수술하는 거라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문제는 내가 비상연락망에 큰 언니의 연락처를 적어버렸고, 그 연락처로 수술에 들어간다는 문자가 갈 줄은 몰랐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 큰언니 역시 나와 비슷해서, 수술이 끝나고 몇마디 통화한 뒤, 별 걱정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별 걱정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왜 유방암에 걸렸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언니가 해맑게 웃으며 던진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난 심각한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어서 그런거 안 걸리나봐. 너도 괜히 걱정하지 말고 살아!"


난 우리 언니가 좋다.


아무튼 그렇게 급박하게, 진단받은 지 2주 만에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결정하고 준비할게 많았다. 특별히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암은 암이었는지...다음날 수술날짜를 잡아놓고 전날 밤에 MRI를 찍다가 문득, 지금이라면 예전에 뛰쳐나온 구강외과에 다시 들어가도 잘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내 세계에 나 뿐이라서, 나를 귀찮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환자들, 선배들, 교수들이 다 힘들었다. 약간은 쫄보이기도 해서 내 행동의 결과가 너무 큰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냥 인간관계 그 자체였고, 인간관계가 힘들고 버거운 사람이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관심이나 정성을 쏟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 밤중에 이 곳에 앉아 있는 모든 환자들과 보호자들, 이 시간까지 근무를 하고 있는 방사선사까지도 그 고단한 삶이 느껴져 절절한 연민의 감정이 솟아났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버겁고 힘겨웠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만취하기 시작해 6년간 주 6일을 술을 마셔댔다.(나머지 하루는 방에서 뻗어 있었다.) 졸업하자 마자 3개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티벳, 인도를 시작으로 정처없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 여행은 확실히 많은 것을 바꿔 놓았고, 인간관계나 선배와의 관계는 전보다는 훨씬 편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감정은 내 안에서 미쳐날뛰었다. 그래서 더 많은 여행을 하고 또 하고.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병원을 때려치고 사법고시를 시작하고. 연애를 하고, 명상을 하고, 불교수행을 다니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 여전히 모든 결정은 혼란과 충동, 반발 속에서 꽤나 감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였는지 결국 많은 것이 잿더미만 남기고 사라졌다. 원래 아버지는 내 인생에 없었고, 엄마는 스스로 떠나버렸으며, 사고친 남편은 쫓아냈고, 친구들은 내가 연락을 끊었다. 그 이후로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고, 그게 필요했다. 도무지 인생이 왜 이런식으로 흐르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쓰레기 같은 글들을 쓰고 또 쓰고. 그간 독서는 시간낭비라 생각해, 제대로 읽지 못했던 책을 잔뜩 읽었다. 영화도 보고 영화도 찍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혼란스럽던 내면이 가라앉는 와중에 결정적으로 암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간 갖고 있던 모든 원망과 분노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곧(?) 죽을텐데 도대체 "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 하고 매달리고 화내고 혹은, 복수하는 꿈을 꾸고 언젠가는 쫄딱 망하게 된 그들이 내게 비참하게 사과하는 상상을 하는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어차피 그들의 변화는 그들의 몫이고,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가 변화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몸소 경험해 알고 있는 사람으로써 말하건데, 그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간 내 인생을 쓸데없는 인간들에게 소비한 것 같아 화가 나고 억울할 때가 있었지만, 더이상은 그 사람들에게, 혹은 내가 잘못 선택한 것들에 대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낭비하고 싶지가 않다.


너네 일들은 난 이제 모르겠고.

나는 그냥 지금 당장 재미있고 행복할거다.


한참 방황하며, 두려워하며, 회피하며 도망치듯 여행하며 보낸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즐겁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모토라고 생각했다. 이미 한국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성취를 얻었으니, 굳이 더 이상 얻어야 할 것도 없었다. (돈은...필요하다. 더 놀기 위해.) 시간낭비는 했는데 원래 재미는 시간낭비를 하면서 얻는 것이니까. 그러고보면 여지껏 여기저기 방황하며 보내느라 참 재미있는 인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종류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새벽 수영이다.


이걸 쓰려고 이렇게나 길게 쓰다니. 근데 나는 내가 절대로 새벽 수영같은 것은 하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건 정말이지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다. 그리고 이건 무조건 술을 끊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0기라지만 나름 암환자라 살면서 절대 끊을수 없을거라 여겼던 술을 한방에 끊게 된 것이다. 그래도 살고 싶은지, 이제는 어떤 종류의 술을 봐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암만 생각해봐도 놀랍다.) 그리고 그 덕분에 새벽 수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2회만 등록해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재미가 붙어 급기야 주 5회로 늘리게 되었다. 어느날 새벽 6시에 서투른 수영을 하다가 문득, 이 곳에 있는 나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고, 매일 새벽6시에, 수영을 한다고?


그 어떤 오지를 가도, 그 누구를 만나도, 온갖 운동을 해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각이었다. 여기 있는 나는 완전히 새로운 나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속이 답답해 자다가 눈을 뜨는 일도,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불쑥 화가 나는 일도 별로 없다.(아주, 아주 가끔...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에 여전히 화가 나는 것은 같지만...이유없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일은 없어졌다. 이건 도대체 누구냐. 윤회를 믿지 않지만 새삼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래서 여러분. 술을 끊고 수영을 합시다. 그러면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다시 태어나면 이것 저것 해 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도 가볍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 그래서 요즘은 이것저것 글을 쓰고 있고, 재미있게 놀고 먹고, 친구에게 그간 소홀했던 다정한 말들을 주고받고, 그러느라 바빠서 여기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는 얘기를 이렇게나 길게, 변명하며 남겨본다.


다들 그간 잘 살고 계셨나요? 진심으로 모두들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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