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했다.
누군가를 만나자!
그런데 어떻게?
마흔의 히키코모리에게 '소개'는 옵션에 없었다.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던 지인들과도 연락을 끊어버렸다.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내게 전 남편의 안부를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결혼할때 청접장을 돌리는 것 처럼 이혼했다고 이혼장이라도 돌려야 하는걸까. 심지어는 이혼했다고 말해도 " 구관이 명관이지? 그냥 다시 합쳐 " 뭐 이런 소리도 듣는다. 이혼한 경위에 대해 궁금해 하는 눈빛이 마치 어제 끝난 막장 드라마의 결말을 몹시도 궁금해 하는 눈빛 같았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안그래도 예민한 상태에서 도저히 너그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근데, 너그럽게 넘어갈 말들은 아니지 않나?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내가 반대 입장이래도 궁금하긴 할 것 같다.
약도 먹었겠다, 꾸역꾸역 나가서 운동도 했겠다, 이 여세를 몰아 어떻게든 자체해결을 해 보기로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데이팅앱과 각종 소모임에 가입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놈의 데이팅 앱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도 딱히 인기있을 외모가 아닌데다가 은둔으로 인해 더 망가진 외모는 아무리 데이팅 앱의 남녀 성비가 9대1이라지만 기본적인 컷 통과에도 매우 부족한 처지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외모 외에도 내세울게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프로필에 쓸 말이 하나도 없었다. 눈도 침침하고 판단능력도 상실된,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유니콘 같은 남자가 나타나길 기다릴 수 밖에.
양심상 사기 치고 싶지는 않아서 뽀샵을 하지 않은 사진들을 올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오케이 한 남자들이 나를 선택해 주지 않아서(사실 너무 많은 남자들을 보느라 눈이 빠질 것 같아서) 결국 나를 선택한 사람들이 누군지 보기 위해 피같은 돈 삼만원을 결제하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겠다는 의지의 결정체이자 화신이 되었다. 며칠 후에 어쩌다가 몇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간만의 대화가 몹시 귀찮아진 나는 개중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한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일요일 오전 9시에 소개팅앱으로 딱 한번 대화를 해 본 남자를 청계산 입구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나는 산을 걷고 밥을 먹고 한강변을 걷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대화를 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집 앞 라면가게에서 라면을 먹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외모는 대단치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담배를 피지만 내 앞에서는 담배를 못 핀다며 꾹꾹 참았다. 아직도 대학원을 다니느라 돈이 없었지만 서로 돈이 없으니 마찬가지였다. 음악은 소음취급하는 내게 음악취향이 뭐냐고 자꾸 물었지만, 소박한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그 사람의 취향이 나쁘지 않았다. 맛있는 햄버거 집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데이트 했던 여자들 흉을 보는 건 좀 별로였다. 종교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같은 생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상한 점을, 별로인 점을 한참 생각하다가 제일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다. 문제는 나였다.
누군가를 이성으로 만나는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무슨말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처럼 연애의 욕구가 넘쳐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몇십년을 알고지낸 사람에게도 뒤통수를 맞는데, 과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수 있으려면 몇번을 만나야 하는걸까. 애초에 사람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미신이나 다름없는 일이 아닐까.
20대에는 상대방에게 무한의 신뢰를 주면 상대방 역시 쉽게 나를 배신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대방이 아무리 좋은 사람으로 보여도,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나를 배신할 수도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단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본성일 뿐이라고 믿는다. 이런 식의 마음으로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까지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란 건 이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컷 연애나 해 보는건데.
아무튼 그래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남자는 무슨,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혼자라면 돈 많은 혼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