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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코치 Sep 24. 2015

향기는 연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향수가 준 깨달음 하나

 5개월 간의 백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직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십년 전쯤이었나...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인 어느 가을날이었다. 대학원을 가거나 새로운 직업을 찾겠다고 유유자적하며 보낸 시간 탓에 새 직장이 절실한 때였고 그 만큼 의욕 충만 상태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새롭게 들어간 회사는 80년대 초반에 대통령이셨던 분의 아드님이 사장인 출판사의 계열사로, 만화 컨텐츠 온라인 서비스 업체였다. 나는 엔터테인먼트 포털 사이트를 만드는 신규사업부의 기획팀의 대리로 들어갔다. 그 팀에는 부장과 팀장, 나보다 두 세달 먼저 입사한 내 또래의 기획자 두 명과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막내 기획자 한 명이 있었다.   


 전 직장에서 많은 업무량과 대센 윗사람과 동료들 사이에서 하드 트레이닝이 되었던 터라 새로운 곳이라 해도 겁날 것도 없었다. 첫 날은 서로 서먹한 탓에 팀장님과 면담 형식의 얘기를 나눈 시간을 빼면 내내 모니터만 바라보다 퇴근을 했다. 첫 날이라 그러려니 했다. 일주일 정도는 그런 외로운 생활을 태연히 견뎌 낼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그 다음주가 지나도 새로운 멤버인 나를 낯설게 대하는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몇 명 되지도 않는 팀에서 이 정도로 겉돌 만큼 사회성이 떨어졌나? 이상했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의를 할 때 다른 사람 의견에 태클을 걸지도 않았고 잘난 척을 하지도 않았다. 함께 식사를 할 때 내가 먹고 싶은 메뉴가 있어도 조용히 그네들의 의견을 따랐다. 최대한 웃으며,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동갑인 팀의 남자 동료가 잠깐 얘기 좀 하자며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그는 회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기획이 뭐라고 생각해요?” 입사를 위해 인터뷰를 하는 기분이었다. 한껏 굳은 얼굴의 그를 보며 갑작스런 질문에 답을 할 말이 찾지 못했다. 글쎄요… 그는 내 대답을 듣고는 이십 분쯤 자신의 이력과(그 전 직장이 KT 계열사였다고 했던가) 기획자로서 갖는 자부심, 포부 등에 대해서 한참을 떠들어댔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으로 시작한 그 자리는 아무런 결론도 없는 그의 말 한 마디로 끝을 맺었다. ‘뭐, 난 그냥 효승씨가 기획자로서 고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나한테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나보다 자기가 잘났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아님, 직급이 같다고 해서 같은 레벨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회사 경력으로 치면 내가 일 년 정도 더 많은데? 쟤 뭐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야 나머지 팀원들도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못한 모드로 어정쩡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일명 직장 내 왕따였던 셈이다.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한다 싶었다. 한 동안은 그 친구들과 함께 밥상머리를 하고 싶지 않아 점심도 굶은 날도 많았던 것 같다. 한동안 힘없는 새로운 조직원이자 왕따의 일상을 보내느라 우울한 날들을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입사 석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팀은 신규 비즈니스 사이트를 만드느라 연일 야근을 해야 했다. 아무리 소원한 사이라고 해도 매일 같이 저녁을 먹고, 옆자리에서 함께 졸다 보니 멀었던 사이는 우리들도 모르게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처음부터 잘 지냈던 것처럼 사이 좋게 지내고 있었다. 실무를 잘 모르던 부장과 팀장이 공공의 적이 되어 준 덕분이었다. 부장과 팀장을 덤앤더머라 칭하며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바보같이 굴면 덤과 더머 사이에 있는 앤이라고 놀려대는 공감대도 형성해갔다.     


 하지만, 함께 낄낄거리며 지내던 그 순간에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나에 대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적어도 내가 아는 한) 거리 두기부터 했던 그 친구들에게 받았던 상처를 모르는 척 지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어느 날 야근 후 갖게 된 술 자리에서 물었다. 그 때 나에게 왜 그랬는지, 내가 우스웠었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 짧은 시간에 실수한 게 있었는지. 술이 취한 그 친구는 내 질문에 잠깐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 그 때… 네 향수 냄새 때문에 그랬어. 내가 싫어하는 향이었거든. 그래서 너도 되게 별로인 사람으로 보이더라.’   

얼굴에 술을 확 뿌려주고 싶었다. 그 친구는 나를 회의실로 불렀던 날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에 있는 건 옆자리에서 내가 풍기는 향수 냄새에 머리가 아파 너무 싫었다고, 그런데 어느 날 향수가 바뀌어서 괜찮아졌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살바토레페라가모 뿌르 팜므. 첫 출근 이후 한동안 사용했던 향수이자 날 3개월 동안 외롭게 만들었던 향수이다. 20대 후반 시절에는 계절과 날씨, 기분에 따라 바꿔가며 향수를 뿌렸다. 여름에는 켈빈클라인 이터너티나 다비도프 또는 풀향기가 나는 불가리 오파르퓌메, 가을, 겨울에는 좀 더 여성스러운 향의 살바토레페라가모나 불가리 퓨어펨므를 애용했다. 그 때는 향수는 한 가지만 정해놓고 뿌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몰랐다.  


 첫 출근을 하는 날도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부는 날씨에 맞춰 살바토레페라가모 향수를 뿌렸다. 내 깐에는 가을에는 여자인 티를 한껏 내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한동안 열심히 애용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는 그 향수가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향이 옅은 종류였으니 그 친구와 친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째든 그 일은 나에게 억울하다 말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원인이었고, 어이없는 에피소드로 넘기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너희들 모두 완전 유치했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아냐며 다시는 어디 가서든 그런 기득권(?)자의 횡포는 부리지 말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 개월 걸려 힘겹게 형성된 편안한 관계가 어그러질까 두려워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서야 가까워진 우리는 이후 일년이 안되어 각자 다른 회사로 옮겼다. 한 해에 두어 번 정도는 안부를 묻는 친구로 지내며 나의 서운한 기억도 시간에 희석되었다.     


 그 후 나에겐 '3개월 원칙'이라는 것이 생겼다.

 내가 조직에 새롭게 들어가거나 내가 있는 조직에 누군가가 새롭게 투입되면 3개월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회사에서 만나는 누군가와 관계 형성을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으로 정한 나만의 초기 투자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는 어떠한 이유로든 상대에 대해 확정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선입견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새로운 조직원일 경우에는 그 시간 안에는 어떤 모드로 나를 대해서 크게 동요하거나 상처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 때 일을 떠올린다. 지금 저 사람도 예전의 나처럼 이유도 모르는 채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또는 아직은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안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관계 정의의 시점을 뒤로 미룬다. 3개월 정도는 서로 관심을 갖고 투자해야 나도 그 누군가도 어이없게 상처를 받게 될 확률을 줄일 수 있다.    


 또 하나, 옆에 앉은 동료가 향수를 너무 많이 뿌려 대 머리가 아프면 솔직하게 얘기한다. 후각적인 거부감은 그 사람과의 거리감을 생기게 하는 충분한 요인일 수 있다. 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나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그리 갈리지 않는 중성적인 느낌에 가까운 향수를 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단 향내의 여성스러운 향수가 싫어졌다.    


섬끼리 잘 살아가기 위한 깨달음 하나 >  

매일 옆에 앉아있는 동료의 향수 기호를 한 번쯤은 체크하기. 아침마다 뿌리는 나의 향수 냄새를 가장 많이 맡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내 옆에 앉은 직장 동료이니까. 평일 근무 시간의 향은 연인이 좋아하는 혹은 연인에게 어필하고 싶은 향을 고집하지 말고 옆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향은 피해주는 배려 정도는 지니고 살기로 했다. 그 정도의 마음이라면 우리 모두 각자가 섬이라 해도 부러 밀어내지는 않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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