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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루 clou Dec 07. 2016

아내에게 쓰는 편지 : 시간여행

결혼기념일 3주년

2016년 12월, 결혼기념일 3주년.


그래, 당신이 늘 시골 사람이라고 놀려대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7년 전으로 돌아가볼까.

시골 살던 클루가 서울 여자 만나서 곧 결혼기념일 3주년을 맞이하게 되니, 그 출발점으로 가봐야지.ㅎ


1999년 12월, 

클루는 갓 수능 시험을 마친 예비 대학생이었네. 얼마나 후련했을까. 

나만 그랬을지는 모르지만, 당시 고3 남학생들에게 인생의 최대 고비는 수능 시험과 군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첫번째를 무사히 넘겼으니 얼마나 전지전능한 기분이었을까.  

한달 후에나 나오는 시험 성적 따위는 쿨하게 잊어버리고, 학교 공부 역시 놔버린지 오래지.

매일같이 교실에서 영화 시청은 물론이고, 수험생들 유치하려는 주변 대학 탐방도 여러번 해봤는데,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건 몇몇 친구들과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동대문 밀리오레와 두타를 당일치기로 섭렵했던 일이야. 

예상외의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 어머니랑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엔 진로 고민을 좀 했지. 

정말 신기한 건 내 장래희망이 그때까지도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 거야. 

그런데 왜 난 초등교사의 꿈을 접고 서울로 왔을까. 보이지 않는 무엇이 클루를 서울로 이끌었던 걸까.

당신은 불과 겨울방학에 들떠 있을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별거 없지만 그때는 또 의미가 남다른 밀레니엄 00학번으로 불리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새내기 시절을 보냈어.

누군가를 좋아하고, 고백했다가 차이고, 소개팅도 하고, 술도 가끔 진탕 마시고, 과방을 내집처럼 지내고, 

등록금 시위도 해보고, 엠티, 농활, 여행, 동아리 활동 같은거 등등. 

어엿한 대학생, 떳떳한 성인으로서 불법말고는 해볼 수 있는건 거의 다 해봤는데,   

맙소사, 당신은 아직도 중학교 2학년. 


2001년 4월, 

freshman에서 바로 깔끔하게 육군에 자원입대를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얘기하곤 했잖아. 

당신이 국군장병 아저씨께 쓴 위문편지를 내가 받았을 수도 있겠다고. 

당신이 여전히 중학생일때 클루는 이미 아저씨가 되어버렸네. 

지금 우린 같은 30대라서 이상할게 없지만, 

만약 15년 전에 당신과 연애를 시작했다면 나는 중학생을 사귀는 군인이라서, 주위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을거고, 이렇게 결혼까지 올 수 없었을거야.


대학교 1학년때 처음 시상으로 떠올려봤었어.

연애를 하게 되면 내가 살아가는 순간순간 상대방은 뭘 하고 있었을까에 대한 시를 써야겠다고.

이후로 비슷하게 써본 적은 있는데, 쉽게 써지지가 않더라고. 

이게 과연 시로 쓰는게 어울릴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얘기가 영화였다면 화면을 반으로 나누어 표현하기 참 좋았을텐데.

감동을 주고 싶은데 글로 표현하니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감정이입이 안되는거야. 


그때,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대학합격 전화를 받았던 1999년 크리스마스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신촌에서 첫 소개팅을 했던 2000년 여름날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의정부 306보충대로 입대하던 2001년 4월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드디어 인생 최대의 고비를 넘겼던 2003년 6월 전역날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택배 운전을 하다가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던 2004년 6월 어느 무덥던 날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어린 사랑에 웃고 울던 중국에서의 2004년 12월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원어연극과 학회활동으로 바빴던 2005년 10월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내가 당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2006년 뉴질랜드 여름날의 크리스마스에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당신은 그때, 철없는 중학생이었고,  

당신은 그때, 거칠 것 없는 고등학생이었고, 

당신은 그때, 오로지 한가지 꿈에 매달리는 법학도였겠지. 


우린 처음에 시골사람, 서울사람으로 철저하게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 사이의 남남이었고, 

교집합이라곤 2000년부터 처음 만났던 2012년 5월까지 서울 하늘 아래 이따금씩 같이 있었다는 것 뿐인데, 

그동안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도 우리의 운명만은 서로를 위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나봐.

망중한 즐기는 싱금씨

싱금씨!

시간은 사랑 앞에서 멍청해지는 것 같아. 

사랑에 관해서만큼 시간은 비례하지도 않고, 웜홀처럼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지. 

당신을 알고, 당신을 만나고, 당신에게 청혼하고, 당신과 결혼하기까지 걸린 시간 1년 7개월. 

당신도 알다시피 그보다 더 오래 연애한 경험도 있는데, 예전에 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을땐,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상투적인 대답을 했었지만, 사실 그건 정답이었어.


그때도 클루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혼'이라는게 막연했었거든. 그냥 허공에 떠다니는 나룻배 같았지.

단지 어려서 그랬던 것 아니냐고?

그때도 이미 30대에 들어섰으니, 지금 세상에 구닥다리 같이 혼기 얘긴 하지 말자고. 

한때는 불혹에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했었으니까. 


싱금씨, 당신의 무언가를 봤겠지. 

당신을 만나기 전, 단순히 당신을 알게 됐을 때부터 '이런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구나'라고 생각했었지. 

여전히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당신의 선한 인품과 주위를 밝혀주는 늘 긍정적이고 해맑은 기운.  

당신을 만나게 되면서 점점 확신하게 되지 않았을까.  


당신과 연애한지 1,500일이 지났고, 

당신과 결혼한지 1,000일이 지났다는 건 굳이 세지 않아도 스마트폰 어플이 알려주지만, 

나를 만나기 이전의 당신 모습들을 떠올리고, 

당신을 알고, 고백하고, 만나고, 프로포즈하고, 결혼하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일상을 기억하고 헤아리는 건, 스마트폰 기계가 아니라 오직 나만이, 내 가슴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살아온 36년 중에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겨우 4년.

하지만, 나머지 32년보다 그 4년을 더 사랑하오.


28년간 다른 모습으로 살아오다 3년 동안 클루에게 동화되어 왔다고 툴툴거리는 당신. 

사랑하오. 


그리고 결혼 3주년 축하하고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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