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요] 치열했던 당신의 처음으로부터 <비밀의 언덕> 리뷰
2010년대 후반 시나브로 90년대를 배경의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들이 독립영화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기사에선 80년대생 여성 감독들의 데뷔가 주된 동력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하는데요. 그 시작으로 그해 내내 열풍이 불었던 <벌새>부터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도 언급했던 <남매의 여름밤>, <성적표의 김민영>과 <보희와 녹양>, 윤가은 감독님의 <우리들> <우리집>까지 한국 영화가 주목하지 않았던 유년, 청소년기를 차분하게 돌아보면서도 완성도만큼은 폭풍 같았던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흐름을 이어가듯 여름 블록버스터 성수기의 틈바구니를 뚫고 화제가 된 <비밀의 언덕>을 뒤늦게 보고 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명은(문승아 분)의 앞에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눈앞에 쌓인 문제들이 많습니다. 담임 선생님(임선우 분)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포장지에 달린 리본 하나 뜻대로 되지 않고, 아이들 앞에서 부모님(장선, 강길우 분)이 젓갈 장사를 하는 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거짓말을 합니다. 명은은 포기하지 않고 비밀 편지함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반장선거에 당선되지만 이 후의 반장 생활도 녹록치가 않죠. 그러던 명은에게 반장 선거 이후 글쓰기 대회라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옵니다.
앞서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영화의 틀로 <비밀의 언덕>을 소개했지만 이 영화를 그렇게만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혼 가정과 할아버지, 집이라는 공간을 다뤘던 <남매의 여름밤>, 각각 친구와 가족이란 관계성에 집중한 <우리들>, <우리집>, 90년대라는 시대와 일상화된 방황을 담은 <벌새>처럼 각각의 성장에는 주된 주제가 있었습니다. <비밀의 언덕>의 가장 큰 키워드는 '인정'으로 보였습니다. 명은은 언뜻 보기에 빈구석이 많은 담임 선생님 애란의 인정을 위해 투쟁합니다. 왠지 모르게 고급져 보이는 전교 회장의 선물이 그렇게도 신경이 쓰이고, 새로 전학 온 혜진과 하얀의 글솜씨에는 질투심에 사로잡히죠. 왜 그렇게 내 엄마와 아빠는 못되고 나쁜 건지 왜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는지 명은은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해 방황합니다. 이렇듯 앞선 영화들보다 <비밀의 언덕>은 더 포괄적인 시선을 가지고 관객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결핍과 욕망이라는, 우리가 쉬이 아이에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 그 부분에 영화는 온 힘을 다해 집중합니다. 초5, 12살의 계절은 그렇게도 결핍과 어그러짐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계절이 그랬듯이 말이죠.
포괄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비밀의 언덕>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만큼은 아주 날카롭게 벼려져 있습니다. 독립영화 특유의 긴 호흡과 절제를 작품은 아주 효과적으로 압축시켰습니다. 122분이라는 꽉 찬 러닝타임 내내 명은의 사건들은 쉴 새 없이 관객을 두드립니다. 마치 액션영화처럼 명은의 사건은 아주 효과적으로 들어차 있되 사건과 사건들은 유려하게 꿰어져 있어 명은에게 집중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와 같은 반짝이는 배우들의 연기가 그 궤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었고 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키보드이자 다수의 독립영화에서 좋은 음악을 채워주었던 연리목의 음악이 <비밀의 언덕>이 더할 나위 없이 적당했습니다. 아주 분명히 지루하지 않은, 그저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많은 성장영화, 그중에서도 아주 어린 시절을 다루는 영화가 많이들 그렇듯이 <비밀의 언덕> 또한 수많은 처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 명은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정하고 나아가 관계와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슬픔이란 감정을 의도하거나 사용하지 않은 씬들이지만, 폭풍과 같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장 저부터 그랬구요. 자신의 불행과 수많은 턱들에 허우적거리는 명은이 관계와 글과 사건과 시간과, 배려와 사랑, 분노를 통해 주변과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 모두 지나온 과정이기에 공명하고, 우리 모두 잊었던 과정이기에 성찰을 일으킵니다.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뻔한 표현을 함부로 쓰려다 줄여봅니다. 언어로 칭찬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꼭 극장에서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