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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설모 Mar 28. 2024

빨래방에서 만난 수상한 아저씨

봄맞이 이불 빨래를 하러 엄마와 빨래방을 갔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빨래를 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불들을 집어넣고 키오스크를 몇 번 눌러 카드결제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뒤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으하하하핫!! 이야~~ 으하하햐!!!"


뭐지? 술 취한 사람인가? 하고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덩치가 세배쯤 되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세탁방 로비를 계속 아다니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인간불신의 아이콘, 쫄보 중의 쫄보인 나는 그 순간 바로 엄마를 쳐다보며 '아는 척하지 말고 무시하세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파워 오지라퍼이자 인간사랑단인 엄마는 바로 그분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드릴까요?"


아저씨는 엄마에게 손에 있는 동전들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바로 나를 호출했다. 니가 좀 도와드리라고. 하씨... 무서운데 엄마는 왜 저 사람이랑 엮인 거야. 투덜거리면서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세탁기 사용법을 잘 모르시는 눈치였다.


"이거 6천 원 넣어야 하는데, 지금 2천 원밖에 없으세요."


아저씨는 아! 아! 하면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만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나는 그중 오천 원짜리를 집어서 "이걸로 동전 바꿔드릴게요?" 하고 동전을 바꾼 뒤, 세탁기 돌리는 것까지 세팅해 드렸다. 갑자기 또 큰 소리가 났다.


"으하하하! 아이고!! 고맙슴다!! 이야! 으하하하햐!!!"


그리고 그분은 남은 동전들을 나에게 내밀었다. 엥? 나 주시는 건가? 괜찮아요. 안 주셔도 돼요. 한사코 사양했지만 아저씨는 또 에이!!! 에이!! 하시면서 남은 동전을 나에게 밀었다. 으응.. 불편해.. 집에 가고 시퍼... 하면서 구석에 쭈굴거리고 있으니 아저씨가 엄마에게 말을 거셨다.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 여기!! 다 죽어버렸어!"

"뇌를 다치셨어요?"

"응!! 이승만! 전쟁 때 다 죽었어 으햐하하하햐햐!!"

"그래도 이 정도라서 다행이에요."

"응! 응! 으햐하하햐낄낄낄"


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장애인이구나. 그 순간, 나의 방어막도 사라졌다. 아저씨에게 먼저 다가가 빨래가 몇 분 남았는지 알려드린 뒤,  이불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 내내 엄마는 나를 비난했다. NGO 다닌다는 애가 어쩜 그렇게 무신경하고 못됐냐, 예수님이라면 너처럼 무시했겠냐, 자기는 딱 보고 저 아저씨가 나쁜 사람 아닌 걸 알았다, 저 아저씨, 바닥에 있는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당장은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 대충 무시하고 말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그분죄송해졌다. 그분은 우리가 빨래방에 도착한 시점 전부터 한참을 헤매고 계셨고, 엄마가 억지로 날 밀어 넣지 않았다면 나도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애써 아저씨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분은 앞으로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며 사셔야 할 텐데,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걱정이 됐다.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인류 문명의 첫 징조로 생각되는 것은 '부러졌다가 나은 대퇴골'이라고. 원시 시대에선 다리가 부러지면 그냥 죽을 수밖에 없었다. 부러진 대퇴골이 치유된 흔적은 누군가가 다친 사람의 상처를 묶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돌봤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약자를 도우며 지내왔다는 것이다.


누가 봐약자인 사람들에 비해, 빨래방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오해를 부르기 쉬운 약자다. '수상한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명인답게 살기 위해,  안의 오지라퍼를 조금 더 꺼내봐도 괜찮겠다. '각자도생'이라는 공멸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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