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 또래 친구를 잃었다. 당시 그는 친구가 천 명정도 있던 '인싸'였다. 빈소에 조문객이 어찌나 많은지, 줄이 장례식장을 삐져나와 외부 주차장까지 이어졌었다. 빈소에 와 계신 그의 부모님을 만나고 우리는 모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엉엉 울었다. 나는 그때, 사람이 사람을 '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교만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그렇게나 많은 친구들이 그의 마음을 끝까지 몰랐다.
5년 전에도 친한 친구를 먼저 보냈다. 병세가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남은 시간이 조금은 더 있을 줄 알았다. 잘 이겨낼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소식을 듣게 됐다. 손이 달달 떨려서 스마트폰 잠금 해제를 할 수 없었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대화방에서 사라지지 않는 1을 계속 확인해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
이제는 슬픔이나 황망한 마음이 많이 옅어졌지만, 함께했던 추억은 삶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시시때때로 그를 현실로 불러왔다.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채 살아가는 것이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습게도 우리는 누군가를 잃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부자연스럽고, 멀어 보이기만 했던 죽음이 실체가 되는 걸 보면서, 그것이 나의 이야기이도 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제야 먼저 떠난 이들의 고통과 슬픔이 완전하게 흡수가 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픈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름이 법이 될 때>라는 책에서는 비극적인 일로 희생된 뒤 모두가 기억하는 '법'이라는 형태로 남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까운 이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낼 때마다, 그들의 이름 석자가 내 삶에도 새로운 법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대하는 법을 알고, 우울증 환자들이 생전에 보내는 구조 요청 사인을 찾아보게 된다. 먼저 떠난 이들의 고통이 깊을수록, 남은 자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그때 이런 말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먼저 연락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꼭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꼬리를 무는 후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새로운 다짐으로 탄생한다. 다시 만난다면 이런 말을 해줘야지. 이 슬픔을 잊느니 기억하고 살아야지. 내 후회와 실수들을 계속 기억하면서, 앞으로 나와 관계 맺는 이들에게 잘 적용해 봐야지. 하고.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 우리 모두 죽는다. 그때가 되면, 먼저 가 있던 친구들이 맨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맞아줄 것이다. 그때까지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우리 다시 기쁘게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