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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석 Sep 23. 2015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통영

백석의 詩와 함께한 통영 여행

 당장 떠나려 세운 여행 계획도 막상 그 먼 거리와 눈앞의 일들에 가려 그저 계획으로 남고 만다. 의외로 여행의 시작은 야심찬 계획이 아닌 우연한 기회를 통해 다가온다. 백석이 통영을 향한 이유도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만난 ‘난 (박경련)’ 이라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 여인에게 반한 백석은 그녀의 고향을 보고픈 마음에 통영으로 향했던 것이다.     



 시인 백석도 이 먼 거리를 달려 통영으로 향했으리라. 당시에는 종일 차에 올라도 모자랐을 거리이건만, 연정의 마음으로 가득 찬 그에겐 그저 설레기만 하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가 다녀갔음을 증명하듯 통영 곳곳에서는 백석의 시를 볼 수 있는데, 처음 그의 시를 마주친 것은 강구안이라는 항구 뒤의 작은 골목에서였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통영> 中     


 ‘천희’는 처녀를 부르는 경상도 사투리로, 백석이 사랑했던 ‘난’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통영의 바다와 항구 그리고 한 여인을 마주하며 처음 느꼈던 감정이 연인을 사랑하다 죽는 ‘천희’의 숙명처럼 순수한 사랑에 대응되었다는 것이다. ‘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그가 신석정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에서 처음 나타났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산문 <편지> 中     



 한참동안 강구안을 따라 걸으며 백석이 느꼈을 설렘과 통영에서의 낭만을 곱씹다가 그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어 놓은 ‘난’이라는 여인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시에 따르면 명정골에 살았다는 그녀. 서피랑을 넘어 우물이 있는 마을, 명정골에 다다랐다.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던 백석 역시 두 번째로 통영을 방문할 때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난’은 겨울방학이 끝난 후 다시 상경해 통영을 떠난 뒤였다. 그녀를 만날 수 없음을 알게 된 백석은 충렬사의 계단에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는 시비에 남아 충렬사 맞은편의 작은 공원에 세워져 있는데, 이 시가 바로 <통영2>이다. 지금도 명정(明井)의 우물가엔 그녀를 그리워하며 시를 썼을 그의 모습이 비치는 듯하다.     


난이라는 이는 명정 골에 산다던데

명정 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통영 2> 中     



 세 번째로 통영을 방문한 후에도 백석은 그녀를 만날 수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그는 친구였던 신현중과 난의 집을 찾고 혼인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난의 어머니는 혼인을 허락하기 전 백석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때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현중이 백석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생각지 못했던 친구의 배신으로 혼인은 없던 일이 되고, 대신 신현중이 난과 혼인하겠다고 밝혀 그 자리에서 승낙을 얻게 된다.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中     




 통영에 들를 때마다 늘 함께했던 친구와, 자신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여인이 그의 곁을 떠났다. 백석의 마음에 떠올랐던 감정과 생각들이 짧은 시를 따라 흐른다. 그토록 아름답던 아담한 항구와 파란 바다는 이제 도리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처음 통영에 들른 이방인으로서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의 낭만적인 시상에 반한 것인지 모르지만, 저녁노을이 지는 통영 앞바다에서는 애상 어린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통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통영의 여러 문학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연필 모양의 빨간 등대였다. 생각해보면 유독 통영에는 여러 문학가와 화가 등 유명한 예술인들이 많았다. 역시나 통영의 투명한 하늘과 바다처럼 아름다운 자연은 훌륭한 예술의 충분조건이 되었던 것일까? 통영의 풍경을 맛본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늘 고뇌와 갈등의 산물이다. 역경도 갈등도 없이 그저 아름다움만을 담고 있다면 그 산물은 거짓이다.     



 정작 백석 본인은 후세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시 한 편보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과의 만남이 얻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란 원래 그러한 존재다. 그가 통영에서 그의 연인을 얻었다면 그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느 어부나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기에 그의 시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어 감동을 남기고 있다. 지금 당신이 어떠한 고민과 갈등 중에 있든, 친구와 연인에게 버림받은 시인의 심정에 견줄 수 있을까. 그러한 아픔마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백석과 그의 시가 궁금하다면, 그의 시집을 들고 통영을 걸어보자. 여행은 늘 우연한 기회로 다가오는 법이고, 인생의 답은 우연한 길에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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