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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Jul 20. 2019

즐겨, 다시 오지 않을 날이야

내게 남은 문장들 2

즐겨, 다시 오지 않을 날이야


1~2달에 한 번 보는 친구들과 만나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며 밤까지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내게 쉬고 있는 지금 '여행을 가봐라', '이거 해봐', '하고 싶은 걸 해봐'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앞으로 어디를 갈지 모르지만, 경력이 쌓이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나면 지금처럼 쉴 시간이 없을 거라며 '즐겨, 다시 오지 않을 날이야'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친구들이 앞뒤 재지 않고 아무거나 하란 말은 아니었다. 단지 취준생이라고 너무 스스로 가두면서 지내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가 한 말 자체는 평범한 말이었지만, 집에 가는 내내 '나는 왜 지금 즐기지 못한다고 했지?'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못 하겠다는 말 속엔 지금 이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이 정말 두려워할 만한 일인지 찬찬히 바라봤다. 지금 쉬는 시간의 끝을 단정 지을 순 없지만, 하다못해 굶어 죽진 않겠다는, 두려워하는 그 일 자체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급하면 알바라도 하면 되니깐.


즐기려면 뭘 할지 생각했을 때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도박을 할 것도 아니고, 호화로운 유럽 여행을 갈 것도 아니었다. 뭘 해도 치명적일 것이 없으니 즐기고 싶은 게 있다면 즐겨도 될 것 같았다. 알아서 검열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냥 안 가봤던 괜찮은 카페를 발견하고, 가서 커피 마시며 책 읽고, 글 쓰고, 이력서를 다듬는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서울은 넓고, 갈 곳은 많다. 노랑 하트는 가볼 곳, 빨강 하트는 가본 곳


내가 쓰는 지도 앱에는 가보고 싶은 식당이나 카페가 수백 개 저장되어 있다.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넷에서 보고 괜찮다 싶으면 언제 갈지 모르지만, 어쩌다 그 근처를 가게 될 일이 생길 때 가려고 하나하나 저장해놨다. 그래서 다음 날 일어나면 이 중 하나 골라서 가자고 생각했다.



자다 일어나서 생각난 건 '블루보틀 성수점'이었다. 웨이팅이 걱정되긴 했지만, 시간대를 잘 골라서 가면 오래 기다리진 않을 것 같았다. 지도를 켜서 경로를 찾는 중에 블루보틀 삼청점이 열렸다는 걸 알게 됐다. 검색해보니 성수점보다 한적해 보여서 곧장 찾아갔다. 짧은 웨이팅 후에 들어가서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마셔보고 싶던 커피를 마시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사고 싶던 드리퍼를 샀다. 



드리퍼를 산 것 외에는 생각보다 큰 지출은 없었다. 그러니까 수입 없이 몇 달 동안 매일 그렇게 지내기엔 부담되겠지만, 간간이 가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지금 아니면 가보고 싶었던 곳을 또 언제 갈 수 있을까. 


삶의 구간마다 그 구간엔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느 정도씩 정해진다. 40대에 신입으로 직장에 들어가기 어려우니,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그전에 경력을 갖는 게 필요한 것처럼. 지금이 가고 싶은 곳을 원할 때 갈 수 있는 적기인 것처럼. 


새로운 곳에 들어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또 그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날도 다시 오지 않을 날일 테니, 즐겨야겠지. 어떤 점에선 어떤 날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할 수 있는 한 매일 즐기는 게 이상적 일지 모른다. 행복을 여기에서 찾는 것처럼. 


'즐겁게'라는 말속에 '해야 할 일'을 넣으면 삶이 좀 더 풍성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거기에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피하지 않고 즐겁게 해서 하고 싶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계획표를 짜면 그걸 다 지키는 성향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짜면서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언제를 즐기는 날로 할지 정하는 게 재밌다. 그러니 삶을 좀 더 즐기기 위해 일요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차분히 앉아서 한 주의 즐길 거리를 정해보려 한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즐길 수 있는 자신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상황 또는 성향이 그런 걸 테니 그조차도 즐겁게 받아들여야지.


다음 주엔 어떻게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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