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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Aug 09. 2019

대화에도 조율이 필요해

고등학교 때 2주에 1번씩 짝을 바꿔 앉던 적이 있다. 랜덤으로 자리 배치가 이뤄진 탓에 친한 친구와만 앉을 순 없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통성명도 제대로 못 한 친구들도 있었다. 자리가 바뀌면서 한 친구와 처음 인사하게 되었다. 그는 체구는 작았지만 운동 신경이 남달라서, 어지간한 애들보다 제자리 멀리 뛰기를 멀리 뛰었다. 중학교 때 싸움을 잘했단 소문도 들었는데, 거의 날아다니며 발차기를 했다는 말이 그냥 허풍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 나이에 다소 안 어울리는 금장 시계를 찬 데다, 말할 순 없지만 독특한 배경 이야기를 듣고 나자 호기심이 생겼다. 


좀 더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 친구는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서 자거나 졸았다. 쉬는 시간엔 다른 반 친구들과 있어, 말할 일이 없었다. 자습을 시키고 선생님이 나갈 때면 반은 공부하고 반은 놀았다. 나는 그 중간 언저리에 있어서, 반은 공부하고 반은 놀았다. 그 친구는 노래 들으며 자다가 일어나서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만화책 좋아하냐고. 그렇게 서로 재밌게 본 만화 중 교집합인 만화를 두고 이야기했다. 


몇 개 이야기하다가 그 친구가 '상남 2인조'라는 만화를 봤냐고 물었다. 아마 그때 만화 채널에서 방영하던 'GTO'라는 만화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이름은 들어본 적 있기에, 안다고 하려다 이야기의 맥을 끊고 싶지 않아서, 말할 일이 더는 없을 텐데 뭐라도 이어가고 싶어서 봤다고 했다(지금 쓰며 생각났는데, 그 친구는 '전설의 캡짱 쇼우'라는 만화책을 추천해줬다. 본인이 약간 그런 느낌이 들어서일까). 


마피아 게임을 할 때도 마피아를 하면 할 말이 없어 금방 죽는 내가, 안 본 만화를 두고 이야기하면 금세 소재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터넷으로 흘깃 본 정보로는 대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신나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친구는 내가 우물쭈물한 리액션을 하자, '너 왜 안 봤는데 봤다고 했어?' 라며 물었다. '어?.. 어 그냥..'이라고 말하며 얼버무렸고,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됐다. 그 후 우리는 자리가 바뀌었고 또 그 뒤로 대화할 일은 없었다.


기타 초보인 나는 한 번 튜닝하면 하루 종일 그대로 치지만, 잘 치는 이들은 시시로 음정을 확인한다. 연주할 때마다 줄 상태가 바뀌니깐. 음정에 맞기 위해 필요한 적당한 긴장도 유지해야 한다. 대화도, 인간관계도 그렇다. 나는 친구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황급히 줄을 풀었고, 소리는 이내 뭉개져서 연주는 끝이 났다. 사람을 만날 때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무작정 내 쪽으로 당기거나 상대 쪽으로 푼다고 좋은 소리가 나기 어렵다. 음정에 맞는 소리가 날 때까지 조였다 푸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타의 튜닝기 같은 게 대화에도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지금 음을 내려야 할지, 올려야 할지 알려주는. 튜닝기 없이 튜닝하려면 기준음이 필요하다. 대화는 튜닝기가 없기에 기준음이 중요하다. 음악에서는 절대적인 기준음이 있지만, 대화에서 기준음은 나와 상대의 중간 어딘가, 서로가 맞춰줄 수 있는 곳에 있다. 그게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소리를 내긴 어렵다. 이전 대화에서 상대의 반응을 보고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 대화의 고수는 안 맞는 음정을 활용해서 어떻게든 연주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같이 안 맞추면 맞추기 어려운, 기타도 대화도 초급 단계이다.


그때의 대화를 이제야 다시 복기해보면, 내가 했어야 했던 건 그 만화 들어보기는 했지만, 아직 안 봤다고, 어떠냐고 물어보면 됐던 거였다. 이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때는 몰랐다. 기타를 한참 치게 되면, 지금 음이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조율이 필요한 건 느껴지게 된다. 그때면 잠시 멈춰서 때론 바로바로 조율하면 된다. 대화도 그때그때 맞춰갈 수 있다. 그 친구를 앞으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조율하는 법 하나를 배우게 해 줘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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