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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Sep 27. 2019

뺨 맞은 것 같았던 친구의 한 마디

8년 전, 필리핀 세부로 방학 1달 동안 어학연수를 갔다. 어학연수로 갔기에 매일 오전 오후엔 학원 수업을 들었고, 저녁에는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거나 같이 놀러 가고, 주말에는 보홀 등을 가기도 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간 거라 전부 다 아는 사이였다.


출처 ㅣ https://www.wowboholtours.com/bohol-tours/island-hopping/


한 달 동안 힘든 일은 거의 없었다. Virgin Island의 날씨가 위 사진 같아서, 해먹에 누워 책 읽으며 흔히 말하는 천국 같은 느낌이 이런 느낌이겠단 생각을 할 정도로 좋았던 바닷가가 담긴 카메라를 도둑맞은 거 빼곤(메모리 카드만이라도 어떻게든 받길 바랬다). 자잘자잘하게 긴장도 짜증도 있었지만, 밤마다 망고를 먹는 사긴이 되면 다 풀리곤 했다.


힘든 건, 힘이 없는 거였다고 할 수 있다. 날씨도 제법 덥고, 학원 시설이 못 지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집은 아니었기에 계속 편하지 않았다. 거기에 선생님마다 편차가 있어서, 어떤 수업을 들으면 진짜 영어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또 다른 수업을 들을 때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거나 굳이 안 들어도 될 것 같았다.


어느 날 듣기 싫은 수업이 점심 이후에 있었다. 점심 먹고 잠도 오니 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숙소에 누워 있었다. 같이 그 수업을 듣는 친구가 방에 들어와 수업 가자고 했다. 우리가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나는 그 수업을 가기 싫은, 합리화된 변명을 늘어놓았을 테고 한두 번 설득하던 친구는 이내 포기하고 한 마디 툭 던지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It's your life"


누워있는 데, 그 말이 너무 귀에 남았다. 공연장 스피커 같은 걸로 갑자기 큰 소리를 듣게 되면 귀에 웅웅 거리는 게 오래 남는 것처럼. 숙소 천장을 바라보며 계속 그 말을 되뇌었다. 'It's your life ... lt's your life...' 말 그대로, 내 인생이고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그래, 내 인생이지 그런데..'



출처 | http://usablelearning.com/2011/12/22/want-attention-talk-to-the-elephant/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내가 원했지만, 원하지 않았다. 만장일치가 아닌 결정이었다. 조너선 화이트가 이야기해 널리 알려진, 심리학 책에서 자주 나오는 비유 중 이성을 기수로, 감정을 코끼리로 표현해서 코끼리가 잘 움직이도록 기수가 잘 조절하는 거라는 게 있다. 대부분 우리가 더 낫다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행동은 기수가 하고 싶어 하고,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되기 어려운 걸 코끼리가 하는 편이다. 시험 전 날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건 기수의 입장이고, 게임 한 판 하거나 드라마 한 편 보자는 건 코끼리 입장인 것이다.


침대에 그냥 누워 있을 때만 해도 기수와 코끼리 모두 거기에 동의했다. 그런데 친구의 한 마디를 듣자, 기수가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출혈이 심한 비용은 아니지만 꽤 돈이 들었고, 기회비용도 함께 투자해서 왔는데. 내 삶인데, 내가 책임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피곤한 것도 아니었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을 거면 다른 공부를 하거나 하면 됐다.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기수가 그저 지쳐서 다 내팽개친 것 같았다. 


다시 마음 잡아보려고 코끼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코끼리를 보니 코끼리도 같이 멍하니, 하지만 뭔가 달라진 눈빛으로 있었다. 기수와 코끼리 모두 뺨 한 대 맞고 정신을 차린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교재를 챙겨 강의실로 들어갔다. 옆에 앉은 친구는 대견하게 바라보며 미소로 반겨주었다.



'어른이 됐다'라는 표현에는 약속한 일을 지키며, 하기 싫은 일이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있다. 나는 이 의미에서 볼 때, 아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내 삶에 대해 진지한 생각도, 옅은 책임감도 없는 상태가 됐다. 그냥 그저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충동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10대 때는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 정도는 가라고들 하니깐, 열심히 공부했지만. 방향이 사라지자 방황을 시작하게 된 것이


분명한 방향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방황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가지 말아야 할 방향만 피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면서 하나씩 내 삶에서 책임져야 할 것을 지고 가야 한다.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일지 모른다. 어떻게든 내 삶, 1인분의 삶은 책임져야 하니깐. 


지금도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충동적으로 살 때가 많으며, 원하지 않는 삶을 원해서 살다가 후회하고도 다시 또 그렇게 살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코끼리와 기수 모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마다 친구의 말이 한 번씩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해주고 있다. 조금씩 나아가게 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친구에게 아까 그렇게 말해줘서 덕분에 정신 차렸다고, 고맙다고 했다. 친구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냐고 되물었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이 이렇게 오래 남아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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