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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민씨 Oct 15. 2019

조커, 무엇이 우리를 즐거우면서 불편하게 만들었는가

영화 조커 후기

'조커'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조커'를 보고 온 날이었다.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오다가 살짝 졸았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려 깼다. 싸우는 게 아니고, 종종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전도하는 할머니 목소리였다. 이 분의 톤은 꽤 날카로웠고 내용도 공격적이었다. 퇴근 시간이랑 겹쳐서 사람들이 차 있어서 할머니가 어디쯤 있는지 나한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남성 분이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 너무 시끄러워요!! 조용히 좀 하세요'. 할머니는 당황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시 전투에 나선 이처럼 소리를 지르셨다. 다시 남성 분이 "조용히 좀 하시라고요! 좀!"이라고 하자, 몇몇 사람들이 목소리를 보탰다. 


음악을 듣고 있던 중이라 할머니가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남성 분의 대답에 미루어 볼 때 이런 말을 하신 것 같다. 구원 안 받으면 지옥 간다고. 남성 분은 답했다. "지금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할머니 때문에 지금이 지옥 같아요. 할머니만 조용히 계시면 구원받을 수 있어요"라고 소리치자, 사람들이 빵 터지면서 작은 박수까지 나왔다. 옆에서 봤을 때 할머니 편은 한 명도 없었다. 나 또한 할머니가 조용히 하시길 바랐으니깐.


그런데 마침 '조커'를 보고 와서, 할머니의 입장을 상상하게 됐다. 할머니는 어떤 급한 마음으로 소리친 것이다. 방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새도 없이 혹은 그럴 능력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는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 사람이 더 많은 곳에서 소리를 더 높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할머니는 더욱더 혼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아서'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에게 아서와 겹치는 부분이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사회에 자신을 맞추는 게 있다. 사람마다 다른 기질상 그게 많을 수도 있다. 아예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서는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지만, 어떻게든 웃으려고 했고 사람들을 웃게 하려 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생체 수면 시간이 아침에 잠을 자야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상황을 사회가 고려해주진 않는다. 결국 그는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그를 위해 사회가 바로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저 아쉬운 그가 '커피'를 마셔서라도 살아갈 수밖에.


우리는 자신을 사회에 맞추면서도, 자신에게 맞춰주지 않는 사회에 원망, 분노를 가질 수 있다. 영화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기 위해 자신을 맞춰 나가지만, 기본적으로 다 이기적인 존재며,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아서는 '무례하다', '내 이야기 듣지 않는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며 분노한다. 아서가 그렇게 말하는 건 한편 이해할 수 있지만, 아서도 자기 입장대로, 자기만 생각하고 있다. 아서는 토마스 웨인의 집에 불쑥 찾아가며, 광고판을 도둑 맞고 폭력을 당했을 때 바로 사장에게 말하지 않고 있다가 해명의 기회를 놓친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또 아서는 일할 곳이 사라진 심리 상담사의 안위를 묻기보다는 자신이 약을 어디서 탈 지만 신경 쓴다.

 

당신에게 힘이 있다면, 조커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영화는 아서가 조커로 해방되는 계기 또는 아서가 억눌렀던 동기 중 하나가 '힘의 결핍'으로 보이게 한다. 아서는 랜들이 준 총을 들고 혼자 코미디 연습을 한다. 그러다 가상의 어떤 남자를 비난하면서 뜬금없이 총을 쏴버린다. 그의 부정적인 생각의 표현이자, 그가 생각한 코미디는 일종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총이 있기 전에는 그 폭력성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고, 그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그저 쓰레기통을 차거나, (마치 목을 졸라매듯) 온 힘을 다해 신발을 늘리는 것처럼 사물에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아서가 처음 광고판을 훔친 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할 때 의아한 모습이 보였다. 집단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영화에서는(실제로는 어떨지 잘 모르지만) 보통 얼굴과 머리를 보호하는데, 아서는 두 손으로 성기 쪽을 보호했다. 영화상에서는 그쪽을 때리지도 않았다. 남성의 성기가 주로 남성성이자 힘으로 상징한다고 할 때, 아서는 생존보다, (힘은 없지만 만약 힘이 있다면 발휘했을) 폭력 또는 폭력성-자신의 핵심 정체성일지도 모를-을 보호하는 걸로 보였다(물론 그곳도 맞으면 죽을 수 있는 곳이지만). 비슷하게 폭행을 당하던 지하철에서는 곧바로 총으로 쏴서 죽여 버린다. - 영화를 볼 때 이런 식의 상징 해석은 잘 안 하는 데, '조커'에서는 희한하게 그게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에서 만난 할머니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 보자. 할머니가 지하철에서 소리친 건 어쩌면 할머니에게 별다른 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할 곳이 다른 데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누가 들으러 올 리도 없고, 강제로 듣게 할 수도 없을 테니. 만약 할머니에게 사람들을 강제로 모을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할머니뿐만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조커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이질적인 동질감이 들었던 건가 싶기도 했다. 퇴사 관련 유머에는 주로 사표를 사장에게 던지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일어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그건 하나의 폭력임에도 우리는 그저 웃어넘긴다. 대부분 사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며, 어차피 일어날 일이 아니니 상상으로만이라도 '힘'을 써보자는 것에 공감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커는 우리가 실제로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생각해봤던 걸 실제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했다. 


'조커'의 호불호를 만든 요소 중 하나는 이 부분이 주는 이질감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떤 부분은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용인할 수 없단 마음이 동시에 들게 된다. 그의 잘못을 보며 정의감이 들면서 그의 자기다움을 찾는 모습에 해방감이 드는 이질적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후자의 감정이 들게 한 것이 불편한 것이다. 우리는 힘이 있어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하기 때문에. 



'조커'는 아서가 참아왔던 것들이 자기 답지 않음을 깨닫고, 진정한 자기다움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견뎌야 했던 사회성을 향한 노력은, 한없이 높아 보이는 계단을 매일 오르내려야 하는 것과 7개 이상의 약으로 표현된다. 그가 회사, 친구, 엄마, 토마스 웨인, 머레이 모두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무시당했을 때 버틸 힘을 잃고, 자기답게 살기로 한다. 약을 끊고, 자기가 웃고 싶을 때 웃으며, 춤추며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죽이고 싶을 때 죽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아서가 모든 사회성을 내려놓고(집으로 이제 갈 일이 없으니, 계단을 오르지 않는다) 춤추며 계단에서 내려오는 장면과 경찰차 위에서 피로 입을 그린 뒤 환호 속에 춤추는 장면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 장면들을 관객들이 멋지게 받아들이게 연출해서 이질감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들었다고 본다.


우리는 아서처럼 모든 걸 다 버릴 수 없다. 설령 힘이 있다 해도 그걸 그렇게 사용할 수 없다(아서처럼 '총'이라는 힘을 대부분 가질 수 있는 미국에서 우려 여론이 있는 건 이해할 만하단 생각도 든다). 각자가 각자 원하는 대로 사는 세상이 좋을지 생각해보면, 지옥일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다만 가끔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의무들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을, 악한 동기의 구현을 바라는 마음(사표 던지기 같은 작은 것으로라도)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럴 때가 오면 '사이다' 같을 거란 생각에. 그걸 인상적으로 표현한 아서의 모습을 보면서 대리 전율을 느끼게 되는 걸지 모른다. 


조커는 힘을 가지게 되자 세상과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게 된다. 총을 들고 집에서 춤을 추고, 살인 후 도망친 화장실에서 춤을 추고,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고, 머레이 쇼에서 춤을 추고, 경찰차 위에서 춤을 춘다. 혼자만의 춤에서 모두 앞에서 춤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존재감 없이 살던 아서는 이젠 다르다고 말한다.


아서가 해석한 정체성 : 코미디의 재정의

해피? 무슨 소리, 엿같이 살면서 단 하루도 행복(Happy)했던 적이 없었는데. 

아서는 어릴 때부터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웃기지 않았다. 엄마마저도 웃기지 않는 그가 코미디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다. 엄마는 그를 해피라고 불렀지만, 아서는 결코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난 항상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어.

아서는 평생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고 자신은 원래 그런 거란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를 웃게 하는 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폭력성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느꼈던 그의 삶에 가해진 폭력을 비극이 아닌 '개 같은 코미디'로 받아들이고, '진짜 코미디언'이 되기로 한다.


라디오에서 슬픈 사랑의 노래 
내 얘기랑 똑같아 나를 웃음 짓게 해
롤러코스터 - 어느 하루 중


그는 원래 그가 생각해둔 최고의 조크, 나의 죽음이 삶보다 가치 있기를(이 해석에 대해 의견이 갈리지만, 굳이 '가취'라고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그의 삶을 비극이라고 봤고, 자기처럼 어떤 사람은 삶이 비극이어서 죽는 게 차라리 나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자조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본다.


그런데 그가 원했던 모든 지지와 인정이 없어지고, 무시당하고, 버팀이 됐던 소피와 관계도 망상이며, 아버지처럼 여긴 머레이도 자신을 조롱하는 걸 직면하게 됐을 때, 그는 사람들이 웃는 방식대로 가 아닌 자기 삶 같은, '개 같은 코미디'를 보여주기로 한다. 



비극적인 삶을 끝내는 것보다 세상이 비극적으로 되는 게 무엇보다 재미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불타는 도시를 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며, 시위하는 현장에서 행복해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이고, 폭력이 가득한 곳이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재밌는 세상이다. 그가 사회 유지의 상징인 경찰차 위에 올라서서, 피로 조커의 입을 그렸을 때, 진짜 조커가 완성됐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해서 아서처럼 되는 게 아니듯, 아서 또한 꼭 그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서는 그렇다고 꼭 원래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서는 자신이 웃는 게 감정과 상관없이 웃는 병이라고 하지만, 살펴보면 대부분 화나고, 슬프고, 스트레스받을 때 웃는 것으로 보인다. 웃고 싶지 않을 때일수록 웃게 되는 것이다. 아예 초반부터 그는 울면서 미소 짓는 연습을 한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일까? 그럴 수 있다.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꼭 다 그렇진 않다. 그의 망상을 보면 그가 원하는 게 잘 나타난다. 망상 속 머레이 쇼에 관객으로 있을 때 그는 관객들과 같은 포인트에서 웃고, 그의 말에 사람들이 경청하고, 머레이가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추켜 세워주고, 아버지 같은 이를 만나면서 부자 관계를 얻게 된다. 또 망상 속 소피는 그의 유머에 진짜로 웃어주는 걸로 나온다. 그는 사회에 잘 녹아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는 그 모든 걸 결국 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망상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삶에서 망상도 끝이 나고,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하지만 절망만 만나게 된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걸 다르게 채우기로 한다. 처음으로 모두가 자기 편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됐기에. 


아서가 조커가 된 책임은 누구에게?

정신 병원에서 담당 직원은 이곳에 오는 사람이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범죄자 거나 자신과 사회에 위협이 되거나, 갈 곳을 잃었거나. 정신 병원은 사회에서 격리, 배제를 의미한다고 보인다. 아서는 격리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비유적일지라도 격리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변에, 내가 친한 사람 중에 아서 같은 이가 얼마나 있는가를 돌아보면,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어떤 비극을 느끼게 된다. 지하철에 만난 할머니 같은 분을 친구로 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 했다. 그리고 나도 친구로 두기 어렵다. 격리시키자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일종의 '님비' 현상이 조커를 만드는 걸 수 있다.


아서는 정신질환의 무서운 점을 아닌 척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병들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아픈 대로 이해받을 수 있지만 정신 질환은 쉽게 이해받지 않는다. 아서는 단순히 영화에서 나온 일들이 일어나서 조커가 된 게 아니다. 그의 삶 전반을 거쳐 만들어졌다. 아서의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를 '조커'로 만들고 있고, 만들 수밖에 없는 여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단 이야기다. 아서에게 일어난 일들을 좀 더 넓게 적용해 본다면, '사회화' 자체가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토마스 웨인을 파시스트라고 지칭한 기사가 짧게 나온다. 우리는 하나 됨을 강요하는 걸 못 참으면서도, 다름은 용납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과장님 유머'에 웃기를 강요하는 것에 분노하지만, 아서 같은 유머에도 분노한다. 코미디는 주관적이라고 하지만 대다수가 웃지 못할 것을 말하면 무시당한다. 그게 단순히 나쁘단 말이 아니다. 그냥 우리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조커에게 환호했던 시위대들 중 아서의 친구가 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영화는 계속 이 부분을 건든다. 아서는 피하지만 조커는 좋아하는, 그 어떤 심리를.




우리의 삶이 개 같은 코미디가 안 되게 하려면

영화를 본 뒤, 아서 같은 이들이 더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특별히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답답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이 실제로 안 일어날 수 있을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우리는 사랑받고 싶지만, 서로 사랑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사랑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만이 나아갈 길이란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끼리 놀면 꼭 1~2명씩 깍두기 역할을 맡은 이들이 있었다. 어리거나 장애가 있어 게임에 잘 끼지 못 하는 친구들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같이 게임하면 팀이 이기는 데 방해되어 껴줄 수 없지만, 아이들은 배척하지 않았다. 승리 여부에 영향은 없지만 같이 놀 수 있게 방법을 찾아낸 게 깍두기다. 깍두기는 그때, 그 시점에만 할 수 있지만, 그 원리엔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우리 모두 어딘가에선 깍두기 일 수밖에 없다. 서로 그 부분이 있을 때마다 같이 도와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는 부분이 나온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사랑을 어떤 감정으로 묘사하기보단 행동을 강조하는 걸로 보인다. 기독교적 의미를 뺀다 해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었다면 아서는 조커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주변에 숨겨진 아서들이 우리와 함께 잘 어우러질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가 사라질 날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조커가 '아름답게 보는 세상'이 오는 걸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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