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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Apr 19. 2024

언어로 직조한 공간


외부세계의 언어는 납작하다. 발화의 행위는 현재성을 넘어서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발화되는 단어들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매체를 매개한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는 것만을 목표함으로써 더욱 표준화되며 빈곤해지곤 한다.


나는 내게 오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궁극엔 타자를 서사적 존재로 이해하는 데에 언제나 실패할 것임을 안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오해이며 대화란 이해의 불가능성을 주고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눈을 반짝이며 오늘의 대화로 너를 이해하게 되었어, 하는 말을 듣던 순간만큼이나 누군가가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너는 나를 알 수 없고 나도 너를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초여름의 풀내음, 어스름 속 조금 상기된 네 볼, 우리가 주고받던 애정 어린 눈빛 그런 것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글을 쓰는 건, 적확한 단어를 발굴해 내는 데에 조금 더 정성을 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화와는 다르나, 나의 이야기는 결국 타인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불가능성의 특성을 공유한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런 건 욕심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런 건 오만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설명하지 않으며 내면으로 침잠하고 싶다. 스탠드 하나만을 켜놓고 소파에 파묻힌 채 더욱 선명해지는 모서리들을 소리 없이 관찰하는 시간. 나의 언어가 추상을 향해갈 때,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하려 하지 않을 때 내가 가지는 건 하나의 공간이다. 아직 그 공간성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나이게 하는 건 오히려 그 공간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운 서사는 자주, 이야기보다 그 사이의 어둡고 깊은 틈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처럼.


전엔 서사적 구성물이 되지 못한 나는 무엇이 될지, 둥둥 떠다니다가 투명해져 버릴지, 자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기로 관찰자의 눈으로 본 나는 어떤 이야기로 존재하겠으나, 나에게 나는 그냥 투명해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했다. 그런 언어로 존재할 때만 내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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