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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먼지 Jul 09. 2020

어른 자격증은 없나요?

자책에서 살아남기

“아이 심장이 안 뛰네요”


임신 16주, 아들인지 딸인지 설레는 궁금증이 풀리는 날, 들은 말이었다. 아픈 것도 없었다. 출혈도 없었다. 입덧도 그대로였다. 단 1%도 상상하지 않은 답변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내가 처음으로 꺼낸 말 “제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그 순간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었다. 몇 초간, 여러 가지 행동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에 뛰던 장면, 뒤집어진 피부 때문에 피부과 연고를 바르던 장면, 일하면서 짜증 냈던 장면. 모든 것에 이유를 찾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바로 나. 나의 생각, 나의 어리석음, 나의 선택.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문 나의 생각은, 그곳으로 귀결됐다.


밀당하는 못 된 여자

'습관적인 내 탓' 때문에 우울증이 온 적이 있었다.

일과 사람 관계에서 연이은 좌절을 겪으면서 증상이 시작됐다. 당시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 일을 할 때였다. 담당 부장은 아직 내가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나가기에 부족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라고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무서울 정도로 친절했던 미소가 생생히 떠오른다. 실제로 그때 나는 내가 너무나 부족해 보였다.

비슷한 시기, 일하면서 만난 남자에게 차였다. 헤어지면서 그 남자는 "네가 조금 못되게 굴었으면... 밀당해 줬으면 너를 더 좋아했을 텐데”라는 개소리를 남겼다. 실제로 그때 나는 밀당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후, 안 되겠다 싶어 정신건강 상담소를 찾았다. 수면제 처방을 받으며 1:1 상담을 이어갔다. 상담가가 어린 시절 무의식 속 상처를 떠올려 보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수두를 앓고 있는 여동생을 방에 격리한 채 간호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엄마와 여동생이 방문을 닫고 , 나 빼고 둘이서만 딸기를 먹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딸기 못 먹은 상처’를 핑계 삼아 엄마에게 울며불며 통곡했다. 엄마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의 우울증은 시간이 해결해 줬다.

‘내 탓’ 습관은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나아졌다. 잘하고 싶은 욕심과 기대를 덜어내니, ‘괴로움’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건 , 한 1% 정도라고 생각하니 잘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따라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 ‘양양’이라는 인디가수의 노래다.

'지금 이 정도의 나도, 충분하다'라는 가사다. 10년이 지나도 늘 위로가 된다.


“이 정도로 이 정도도 괜찮아. 이 만큼만 이 만큼도 충분해

세상이 나에게 왜 그리 느리냐고 하면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그랬다 하겠어

그대가 나에게 왜 그리 더디냐고 하면 나무 아래 쉬었다 가느라 그랬다 하겠어

세상이 나에게 더 빨리 오라고 하면 나는 구름 따라 흘러가겠다고 하겠어

그대가 나에게 더 빨리 오라고 하면 웃음이나 한 번 더 나누자 할래"

                                                    양양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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